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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6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일본 사신이 와서 머물던 동평관(東平館)과 야인 측 사신이 와서 머물던 북평관(北平館)의 책임을 맡은 관원.

내용

조선초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은 대개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耐而浦)·염포(鹽浦)로 입국한 후 각기 정해진 인원만이 한양으로 상경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은 1409년(태종 9) 일본 사신들이 한양에서 묵을 수 있는 객관(客館)으로서 동평관(東平館)을 지어 관리하였다. 한편 야인의 경우 서울까지 오는 이들을 위하여 북평관(北平館)을 두었다.

감호관(監護官)은 이들 동평관과 북평관의 책임자로서, 현임(現任)·산관(散官) 중 3품 이하 6품 이상의 관원으로 임명되었다. 각각에는 감호관 3명과 녹사(錄事) 2명을 두되, 감호관 3명 중 1명은 의금부(義禁府) 관원으로 정하였다.

당초 동평관은 단순히 상경하는 왜인들의 숙소였으나, 점차 숙소의 기능을 초월하여 왜인 행정 일반에 이르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고, 일본인들의 상경이 금지되면서 동평관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북평관의 경우도 조선중기 이후 소멸되었다.

용례

議政府據禮曹呈啓 倭館野人館 依迎接都監例 設官給印 常置不罷 倭館則稱東平館監護官 野人館則稱北平館監護官 從之[『世宗實錄』 20년 2월 19일 4번째기사]

참고문헌

  • 손승철, 「조선전기 서울의 동평관과 왜인」, 『근세조선의 한일관계연구』, 국학자료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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