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성(大角星)"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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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11 기준 최신판



동방칠수(東方七宿) 중 제2수인 항수(亢宿)에 속한 별. 대각성은 28수의 기준 별자리인 각수(角宿)를 찾아가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별이어서 하늘의 용마루로 인식하였다.

개설

대각성은 오늘날의 목동자리 α별 아크투르스(Arcturus, 0등성)로, 봄철 밤하늘에 보이는 매우 밝은 별이다. 그 때문에 하늘의 왕인 천왕(天王)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28수의 기준 별자리인 각수(角宿)를 찾아가는 길잡이 별이어서, 통치와 기강을 올바르게 하는 하늘의 동량(棟梁) 곧 용마루 별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서는 대각성을 ‘천왕(天王)의 제정(帝廷)’이라 하였고, 『진서(晉書)』「천문지(天文志)」 역시 ‘천왕의 자리’로서 하늘의 용마루[天棟]가 되고 조리[經]와 벼리[紀]를 바로 세우는 별이라고 설명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는 이런 기록들을 초략(抄略)하여, 대각성의 의미를 천왕의 자리이자 하늘의 동량이라 하였고, 그 역할은 통치와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각성에 금성이 머무르면 병란이 일어나고, 일식이 일어나면 흉하게 된다고 여겼다.

이렇듯 대각성은 천왕의 별로 간주되었는데, 동양의 별자리 중에는 천왕을 상징하는 별이 심대성(心大星)을 비롯하여 몇 가지 더 있었다. 『송사(宋史)』「예지(禮志)」 길례 편에는, ‘『개원예의라(開元禮義羅)』에서 이르되, 제(帝)에 다섯 자리가 있으니, 하나는 자미궁에 있고, 하나는 대각성에 있고, 하나는 태미궁에 있고, 하나는 심수에 있고, 하나는 천시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왕의 의미로 해석되는 별 또는 별자리가 무려 5개나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천 의례 때 신위(神位)를 구분하는 데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북송(北宋) 때 『책부원귀(冊府元龜)』를 편찬한 왕흠약(王欽若)은, 역대 천문지에서 북극성은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고, 구진 중의 천황대제는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 정현(鄭玄)이 『주례주(周禮注)』에서 ‘하늘 제사란 동지 제천에서 천황을 제사하는 것’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천시원의 제좌(帝座)는 직접 천제(天帝)를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진서(晉書)』「천문지(天文志)」에서 이미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로 보았다고 평가하였다. 그에 따라 천황대제와 북극성은 제1감(龕)으로 위치시키고, 대각성과 심대성은 단지 천왕좌(天王坐)라 일컫고 제좌와는 다른 부류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제좌는 셋에 그치는데, 자미궁과 태미궁은 제2등으로, 다만 천시원은 제3등으로 열위시키기로 하였다.

이보다 앞선 당나라 때의 교사(郊祀) 신위를 보면, 대각성이 제천 신단의 제3등석에 배치되어 있었다. 『신당서(新唐書)』「예지(禮志)」 〈교사례(郊祀禮)〉에 따르면, 동지 원구(圓丘) 제천을 행할 때 신단 중심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를 제사하되 고조 신효황제를 배제로 삼았으며, 신단 제1등석에는 태미오제(太微五帝)와 대명(大明) 및 야명(夜明)을 배치하였다. 제2등석 앞 열에는 천황대제와 북진성 및 북두칠성·천일성·태일성·자미오제 등의 신위를 놓고, 나머지 내관(內官) 제좌(諸座)와 오성·십이진·하한(河漢) 등의 49좌는 제2등석 12폐(陛) 사이에 두었다. 제3등석에는 중관(中官)과 천시원 제좌(帝座) 및 칠공(七公)·일성(日星)·제석(帝席)·대각성·섭제성·태미오제·태자·명당·헌원·삼태성·오거성·제왕(諸王)·월성(月星)·직녀성·건성(建星)·천기(天紀) 등의 17좌와 28수는 차등을 두어 앞 열에 배치하고, 나머지 중관(中官) 142좌는 모두 제3등석 12폐 사이에 놓았으며, 외관(外官) 105좌는 내유(內壝) 안쪽에, 중성(衆星) 360성은 내유 바깥에 두었다. 이렇듯 제천 의례 때의 신위의 위차를 통해 각 별자리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대각성은 천왕의 자리로서, 그 위상이 매우 높았다.

한편 대각성은 그 좌우에 있는 섭제성(攝提星)과 함께 인식되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에서는, 대각성의 양옆에 각각 구부러진 세 솥발처럼 놓인 6개의 별을 섭제성(攝提星)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섭제성이 두표(斗杓)가 가리키는 곳을 곧장 지시하므로 시절(時節)을 세우는 별자리가 되는데, 그 때문에 섭제격(攝提格)이라 일컫는다고 부연하였다. 이에 대해 당나라의 장수절(張守節)은 『정의주(正義注)』에서, ‘대각성이 양쪽 섭제성 사이에 있는 모습이 인군(人君)의 형상이며, 별이 밝고 성하여 누렇게 윤이 나면 천하가 대동(大同)하게 된다’고 풀이하였다. 이것은 대각성을 가운데 두고 좌섭제 3성과 우섭제 3성이 좌우로 나란히 솥발처럼 자리 잡은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대각성과 섭제성을 오늘날의 별자리로 동정(同定)하면 다음과 같다.

대각성 α Boo –0.04

우섭제 제1성 η Boo 2.68

우섭제 제2성 τ Boo 4.50

우섭제 제3성 υ Boo 4.07

좌섭제 제1성 35 Boo 4.60

좌섭제 제2성 π1 Boo 4.94

좌섭제 제3성 ζ Boo 4.43

이처럼 섭제성은 대부분 4~5등성의 어두운 별이지만 나란히 놓인 형태가 인상적이며, 또 대각성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모양이어서 대신(大臣)의 형상으로 해석되었다. 그에 따라 신하 중 최고의 자리인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의 역할을 하는 별자리로 인식되었는데, 점성에서는 섭제성이 밝고 크면 삼공이 정사를 전횡할 조짐이며 객성이 여기에 들면 성인(聖人)이 제압을 받는다고 풀이하였다. 『정의주』에서도 섭제 6성은 대각성을 보필하는 대신의 형상이며, 두표 곧 북두칠성의 자루가 가리키는 곳을 곧장 지시하므로 팔절기(八節氣)를 세우고 만사를 살핀다고 하였다.

이때 섭제성이 팔절기를 세운다는 의미는, 사마천이『사기』「천관서」에서 시절(時節)을 건립하는 별자리로 보아 섭제격(攝提格)이라 일컫는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또한 『사기』「역서(曆書)」에서, 12차법으로 세성(歲星)이 인(寅)의 위치에 있을 때를 기준으로 삼아 인년(寅年)을 섭제격세(攝提格歲)라고 명명한 것과 상통하는 말이다. 곧 섭제격은 역년(曆年)의 출발점이 되는 해이며, 섭제성은 두표가 가리키는 바를 따라 1년 열두 달의 순차를 만들어내므로 시간의 창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욱이 섭제성의 중간에 위치한 대각성은 28수의 기점인 각수(角宿)를 가리키는 길잡이 별이라는 의미에서 대각(大角)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동쪽 하늘에 창룡칠수의 제2수인 각수(角宿)에 속한 별 중 북쪽에 있는 것이 우각성(右角星), 남쪽에 있는 것이 좌각성(左角星)가 출현하면 1년이 새로 시작되고 농사를 짓는 봄철이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대각성과 섭제성이 남쪽 하늘 중천에 떠서 새로운 시절의 시작을 0등성의 매우 밝은 별빛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대각성과 섭제성은 시간의 시작점이라는 천문학적인 의미와 더불어, 역년의 출발점이자 시간의 기준점을 만들어낸다는 역법학적 의의가 큰 별자리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섭제격의 ‘격(格)’이 ‘월건(月建)을 따라 섭제성이 이른다[至]’는 뜻이라고 풀이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 때문이다. 팔절기(八節氣)는 1년 24절기 중에서도 시간의 중심이 되는 분지절(分至節)과 사립절(四立節)을 합한 말인데, 이 시간의 마디를 두표가 만들어내고 섭제성이 세운다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대각성과 섭제성은 대부분 유성이 출현했을 때 그 위치를 설명하고 묘사하는 위치 정보로 사용되었다. ‘밤에 유성이 북두성 남쪽으로 나와서 대각성 서쪽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세종실록』 10년 11월 27일)이나, ‘밤 초경에 유성이 항성(亢星)의 도수인 대각성 위에서 나와 태미 동원(東垣)이 북 제1성 위로 들어갔는데, 주먹만 한 크기이고 꼬리 길이가 4∼5척쯤이었다’는 기록(『성종실록』 22년 4월 10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섭제성 역시, ‘밤에 백기(白氣)가 저성(氐星)방성(房星) 사이에서 일어나 섭제성과 북두괴, 문창성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갔다’는 기사(『태종실록』 2년 3월 21일) 등과 같이 유성의 관측 위치를 설명할 때 등장하고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1871년(고종 8) 1월 1일 곧 설날에 왕이 장순(章純) 왕대비전의 보령이 망오(望五) 곧 41세가 되는 것을 경축한 뒤 중외의 대소 신료와 기로(耆老) 군민(軍民)과 한량인(閒良人) 등에게 내린 교시에서, “부덕하고 어리석은 내가 외람되이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현명한 가르침을 힘입어서, (중략) 이에 하늘이 온갖 복을 모은 상서를 내려 장수하게 하여 41세가 되었으니, 헌책(軒策)에서 섭제(攝提)를 점치면 옥약(玉籥)이 천시(天時)에 으뜸이고, 희도(羲圖)에서 대연(大衍)을 점치면 규기(珪紀)는 지수(地數)에서 하나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때 희도(羲圖)는 복희의 하도(河圖)를 일컫고, 헌책(軒策)은 별자리를 관측하여 성력(星曆)을 처음 만들었다는 헌원(軒轅)의 책수(策數)를 말하므로, 섭제를 점친다는 것은 왕대비전의 축수를 수놓아 보니 천시(天時)가 좋아 장수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대비께서 큰 복으로 받으신 수(壽)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아홉째인 오복(五福)의 하나요, 태어나신 해를 헤아려보니 열세 달이 든 윤년 정월이었다. 단군께서 강림하신 저옹(著雍)의 해와 일치하니 상서로운 무(戊)의 천간(天干)이 천 년에나 한 번 있는 천운으로 돌아오고, 천황씨(天皇氏)가 일어나 다스리신 섭제격(攝提格)의 해와 부합하니, 인간이 태어나는 지지(地支)인 인(寅)의 지지를 맞이하여 1만 8,000년의 아름다운 경사가 열리게 되었다’고 찬사하고 있다(『고종실록』 15년 1월 25일). 요컨대, 대왕대비의 생년인 무인년(戊寅年)이 매우 의미 있는 해인데, 무년(戊年)은 단군왕검이 태어난 천 년에 있을까 말까 한 상서로운 해이며, 인년(寅年)은 삼황(三皇)의 으뜸인 천황씨(天皇氏)가 다스린 해로 1만 8,000년 만에 맞이하는 경사스런 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내용은 『십팔사략(十八史略)』「태고편(太古篇)」의, ‘천황씨는 목덕으로써 왕이 되어 해를 섭제에서 일으키고 백성들은 무위이화(無爲而化)되었는데, 형제 12인이 각각 1만 8,000세를 누렸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일성록(日省錄)』에는 1787년(정조 11) 2월 20일에 희정당(煕政堂)에서 문신(文臣)의 제술(製述) 시험이 있었는데, 이때 논제(論題)가 ‘해는 섭제에서 기산한다[歲起攝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섭제격의 역리(曆理) 문제를 다룬 것이 흥미롭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삼국사기((三國史記)』
  • 『천문류초(天文類抄)』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