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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사(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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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사(하남)]]
{{개념용어|대표표제=천왕사|한글표제=천왕사|한자표제=天王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사리(舍利), 흥천사(興天寺)|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기도|시대=고려~조선|왕대=|집필자=오경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0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4023_002 『세종실록』 28년 4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에 있던 절.
 
 
 
=='''개설'''==
 
 
 
천왕사(天王寺)는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이 절에서 나온 사리가 세종대에 궁궐에 반입되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인해 흥천사에 안치되었다.
 
 
 
=='''내용 및 특징'''==
 
 
 
천왕사의 창건은 고려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惠眞塔碑)」에 의하면, 원종 대사 찬유(燦幽)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고려 태조를 뵙자 태조는 대사의 고매한 도덕을 존경하여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대사가 이곳에 주지하면서 사부대중을 크게 교화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46년(세종 28) 천왕사의 사리 10개가 궁궐에 유입된 적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4023_002 『세종실록』 28년 4월 23일]). 세종이 신하들 몰래 불사리를 궁궐에 모셔놓고 예배를 드렸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료들의 반대에 못 이겨 사리를 흥천사로 보냈다. 천왕사 사리는 고려말에도 개경에 옮겨져 신앙되었다. 1366년(고려 공민왕 15)에 신돈이 재추와 함께 광주 천왕사의 불사리를 맞이하여 [[왕륜사(王輪寺)]]에 두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보고 황금과 채색 비단을 보시하였다. 이런 행사가 조선초에도 이어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1차 조사된 이후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세종대학교박물관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조사에서 목탑지(추정)·건물지·담장지·배수 시설 등을 찾았고, 기와·벽돌·대형 호(壺)·청자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출토 유물 중 글씨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12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천왕(天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8점으로 가장 많았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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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경기도]][[분류:고려~조선]]
 

2018년 1월 24일 (수) 22:29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