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사(경주)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낭산에 있었던 절.

개설

679년(신라 문무왕 19) 명랑(明朗)이 창건했으며,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도 한다. 명랑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써 당나라를 물리치고 지은 절이라고 전한다. 고려 때 문종은 번병(蕃兵)을 물리치고자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개설하기도 했다. 조선 태종 때 총남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 현재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으며, 1963년 1월 사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679년(신라 문무왕 19) 명랑(明朗) 법사(法師)가 낭산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창건했다.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도 하고, 선덕여왕릉 아래, 신문왕릉 옆에 있다. 사천왕사의 창건에는 다음의 설화가 전해온다.

674년 당나라의 대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명랑 법사는 문무왕(文武王)에게 낭산 남쪽 신유림에 도량[道場]을 세울 것을 권했다. 그런데 절을 세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자 명랑은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든 뒤 유가승(瑜伽僧) 12인과 더불어 문두루비법을 써 당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문두루비법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밀교 의식의 하나로, 명랑이 중국에서 배워와 처음 썼다고 한다. 이후 5년 만에 완공한 절이 사천왕사(四天王寺)였다. 절이 위치한 신유림은 경주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의 하나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도리천(忉利天)이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다. 사천왕사는 경덕왕(景德王) 때 월명(月明)이 「도솔가」, 「제망매가」 등의 향가를 지었고,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양지(良志)가 천왕상, 팔부신중을 조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1074년(문종 28) 문종(文宗)이 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 동안 개설하여 번병을 물리칠 것을 기원했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계림(鷄林: 현 경상북도 경주) 천왕사(天王寺)가 총남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사천왕사는 총남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는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로, 당시 천왕사가 경주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의 하나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 현대

현재는 폐사된 뒤 빈터만 전하고 있다. 절터 규모는 남북 약 120m, 동서 약 110m이고, 1963년 1월 사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진행한 발굴 조사에 따르면 가람의 구조는 중문(中門)과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금당의 남쪽 동서 양측에 목탑(木塔)이 세워진 형태라고 한다. 2기의 목탑이 배치된 쌍탑식(雙塔式)의 전형적인 통일신라 가람 모습을 최초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강당 터 위에 동해남부선 철도가 놓이고, 또 절 앞쪽으로 경주-울산 간 산업도로가 지나가 절터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 있다.

문화재

이수(螭首)와 비신(碑身)이 없어진 귀부(龜趺) 2기와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가 있다. 동쪽 귀부에는 사천왕사사적비가 있었고, 서쪽 귀부에는 문무대왕비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절터에서 출토된 사천왕상전(四天王像塼) 파편은 조각가 양지가 만든 것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1년 10월 사역의 남쪽 귀부 주변에서 소형 배수로 위에 설치된 통일신라시대의 석교(石橋)가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197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