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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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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敎理)와 병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효지(李孝之) 혹은 이광후(李光後)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참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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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敎理)와 병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효지(李孝之) 혹은 이광후(李光後)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참형을 당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세종 시대 활동'''==

2018년 1월 9일 (화) 22:55 판




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敎理)와 병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효지(李孝之) 혹은 이광후(李光後)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참형을 당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31년(세종 13)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38년(세종 20)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으로 들어간 후, 1444년(세종 26)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풍수지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경복궁 서쪽에 저수지를 파서 영제교(永濟橋)로 물을 끌어넣고, 개천(현 청계천) 물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세종실록』 26년 11월 19일) 집현전 교리(敎理)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국조보감(國朝寶鑑)』],[『임하필기(林下筆記)』] 같은 해 말에는 사헌부(司憲府)에서 이현로에 대한 탄핵을 올렸는데, 세종은 그가 젊은 관리로 일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 뿐이라며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다.(『세종실록』 26년 12월 18일)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에는 경차관이 되어 평안도와 함길도를 방문하여 왕명에 따라 새 땅을 찾는 일을 수행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2일),(『세종실록』 27년 11월 2일) 그러나 같은 해 12월 이조와 예조의 낭청들과 함께 예조에 모여 창기를 불러 크게 연회를 즐긴 일로 인하여 삭직되었다.(『세종실록』 27년 12월 9일) 그러나 얼마 후 복귀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14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1447년(세종 29)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때, 임금의 즉위 시 관복(冠服)상복(喪服)의 관례에 대해 대신들과 함께 주자의 설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세종실록』 29년 2월 16일) 그 뒤 언문청에서 활동하며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29일) 이듬해인 1448년(세종 30) 집이 없는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터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하기도 했으나, 환관 최읍(崔浥)의 청탁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매관죄로 탄핵을 받았다.(『세종실록』 30년 12월 14일),(『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세종실록』 31년 1월 26일) 이 일에 대하여 세종은 이현로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은 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계속해서 처벌을 요청하였다.(『세종실록』 31년 1월 27일),(『세종실록』 31년 1월 28일),(『세종실록』 31년 1월 29일),(『세종실록』 31년 1월 29일)

얼마 후에는 병조 정랑으로서 하번갑사(下番甲士)인 백화인(白化人) 홍사을마(洪沙乙麿)를 보고도 하지 않고 사직(司直)에 임명했다가 발각되었다.(『세종실록』 31년 2월 14일) 이 일로 대신들은 이현로를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참형 대신 순창(淳昌)으로의 유배로 마무리 되었다.(『세종실록』 31년 3월 20일) 이후에도 대신들은 계속해서 그의 사형을 임금에게 주청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세종실록』 31년 3월 21일),(『세종실록』 31년 3월 23일),(『세종실록』 31년 3월 23일) 그러나 대신들의 청이 계속되자 이현로는 결국 남평(南平)으로 부처되었다.(『세종실록』 31년 3월 26일)

그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전 대부(隊副)이양무(李陽茂)에게 뇌물을 받고 대장(隊長)으로 승진시켜 준 여죄가 또 드러나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후 사천(泗川)으로의 유배가 확정되었다.(『세종실록』 31년 4월 1일),(『세종실록』 31년 4월 5일) 그러나 유배지가 확정된 후에도 사헌부에서 다시금 조사를 청하여 국문이 이루어졌고,(『세종실록』 31년 4월 14일) 그 결과 그 죄가 결코 작지 않음이 드러나 또 다시 이현로에 대한 사형이 청해졌으나,(『세종실록』 31년 5월 18일) 원래대로 사천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세종실록』 31년 6월 10일) 유배형에 처해졌던 이현로는 이듬해 초 사면령이 내려져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文宗) 즉위 이후 이현로는 사간원(司諫院) 등 언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뜻에 따라 복직이 되어(『문종실록』 1년 3월 15일) 승문원(承文院) 교리, 부사직을 거쳐 사직, 승문원 부지사(副知事) 등을 지냈다.

한편 그는 평소에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시화(詩畵)로써 교분을 두터이 하였으므로 안평대군의 가노(家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7월 23일),(『단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단종 즉위 이후에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정권 싸움에서 힘을 얻기 위해 수양대군 대신 안평대군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도록 계획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 그리고 이현로가 계속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행태를 보이자 수양대군이 그를 잡아다가 사사로이 매질을 하는 일도 있었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8일) 이 일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임금에게 그를 체포해 추국할 것을 청하였고,(『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0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2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5일) 계속되는 그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대간에서는 그의 고신을 거두고 다시는 관직에 등용시키지 못하게 해달라는 청을 올렸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0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4일)

이현로는 평소 수양대군의 세력결집을 막기 위해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과 친분을 쌓아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단종 즉위 직후 그에 대한 대간들의 계속되는 탄핵에 김종서와 황보 인은 “정직한 사람이라 버릴 수 없다”며 그를 비호해주었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7일),(『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2일) 이런 가운데 이현로는 계속해서 안평대군과의 친분을 두텁게 유지하였다.(『단종실록』 1년 5월 19일),(『단종실록』 1년 9월 9일) 그러나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보내 참형하였다.(『단종실록』 1년 10월 10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후 이현로는 1791년(정조 15) 장릉에 배향할 충신을 선정할 때 정단(正壇)에 배식되는 충신 32인에 들어가게 되었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성품과 일화

이현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현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선로(이현로의 초명)의 사람됨이 경박하여 절도가 없으며,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었다. 안평대군과 사귐을 맺고 서로 더불어 유연(遊宴)하면서 시련(詩聯)을 창화(唱和)하니, 대군이 그에게 선물을 증여함이 특히 후하였다. 이선로가 혹시는 동료인 벗을 대군에게 헐뜯어 참소하고, 대군이 이를 임금에게 전달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기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15일) “이현로는 마음이 간휼하고 말을 잘하고 행실이 경박하고 무상한 소인인데, 젊어서부터 유사의 이름을 빌어 시·부(賦)로써 안평대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였기 때문에 종실과 귀근(貴近)에게 사랑을 얻어서 드디어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다. 스스로 말하기를,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 장상(將相)의 그릇이다’라고 하며 감히 교만한 기운을 베풀어서 영웅호걸을 능멸하니, 사림들이 다투어 비웃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남방의 신지리요, 북도의 대장군이라[南方新地理北道大將軍]’하였다.”(『문종실록』 1년 3월 15일) 그런데 이 같은 이현로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과 평가는 그가 세조(世祖)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을 하다 그 결과 사망하였기 때문인 측면도 없지 않다.

후손

이현로의 부인 백천 조씨(白川趙氏)는 조휴(趙休)의 딸이다. 자녀는 몇 명을 두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으나 실록에서는 그의 아들 3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남은 이건금(李乾金)이고, 2남은 이건옥(李乾玉)이며, 3남은 이건철(李乾鐵)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동국정운(東國正韻)』
  • 『훈민정음(訓民正音)』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