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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예종 즉위) 9월 예종이 서거한 세조(世祖)의 복을 빌기 위해 이조 [[판서(判書)]][[성임(成任)]], 행 상호군(行上護軍)정난종(鄭蘭宗),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금니(金泥)로 사경(寫經)하게 하였는데, 이때 박경(朴耕)은 [[사정(司正)]]·[[사용(司勇)]]으로 참여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9월 예종이 서거한 세조(世祖)의 복을 빌기 위해 이조 [[판서(判書)]][[성임(成任)]], 행 상호군(行上護軍)정난종(鄭蘭宗),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금니(金泥)로 사경(寫經)하게 하였는데, 이때 박경(朴耕)은 [[사정(司正)]]·[[사용(司勇)]]으로 참여하였다.
  
1477년(성종 8) 무렵에 박경은 사경(寫經)하는 일로 [[봉선사(奉先寺)]]에 다녀오다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宋氏)가 중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라는 방(榜)이 동대문(東大門)에 붙은 것을 보고 [[김일손(金馹孫)]]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박경이 김일손에게 이야기한 이 사실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일손의 자백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는 형신을 받고 7월 28일에야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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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성종 8) 무렵에 박경은 사경(寫經)하는 일로 [[봉선사(奉先寺)]]에 다녀오다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宋氏)가 중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라는 방(榜)이 동대문(東大門)에 붙은 것을 보고 [[김일손(金馹孫)]]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박경이 김일손에게 이야기한 이 사실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일손의 자백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는 형신을 받고 7월 28일에야 석방되었다.
  
1507년(중종 2)에 행 호군(行護軍)심정(沈貞)·남곤(南衮) 등이 [[서얼(庶孽)]]박경(朴耕) 일당이 좌상(左相)[[박원종(朴元宗)]]·유자광(柳子光)·[[노공필(盧公弼)]] 등 임금의 측근을 제거하고, 정미수(鄭眉壽)를 영의정에, [[김감(金勘)]]을 병조 판서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밀고하면서 옥사가 일어났다. 그 해 윤1월에 추관들이 함께 의계하기를, “박경·김공저 등은, 대신(大臣)을 모해하여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참형(斬刑)을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 박경과 김공저는 참형에 처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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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년(중종 2)에 행 호군(行護軍)심정(沈貞)·남곤(南衮) 등이 [[서얼(庶孽)]]박경(朴耕) 일당이 좌상(左相)[[박원종(朴元宗)]]·유자광(柳子光)·[[노공필(盧公弼)]] 등 임금의 측근을 제거하고, 정미수(鄭眉壽)를 영의정에, [[김감(金勘)]]을 병조 판서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밀고하면서 옥사가 일어났다. 그 해 윤1월에 추관들이 함께 의계하기를, “박경·김공저 등은, 대신(大臣)을 모해하여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참형(斬刑)을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 박경과 김공저는 참형에 처하여졌다.
  
 
박경은 학문이 있고, 또 일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필가로서 글씨의 [[서법(書法)]]도 교묘하여 시책의 제목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한다.
 
박경은 학문이 있고, 또 일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필가로서 글씨의 [[서법(書法)]]도 교묘하여 시책의 제목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한다.

2018년 1월 9일 (화) 22:44 기준 최신판




총론

[미상 ~1507년(중종 2)]. 조선 전기 세종~중종 때 활동한 서예가, 반란 주모자. 자는 백우(伯牛)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정붕(鄭鵬)과 박영(朴英)에게서 배웠다.

예종~중종 시대 활동

1468년(예종 즉위) 9월 예종이 서거한 세조(世祖)의 복을 빌기 위해 이조 판서(判書)성임(成任), 행 상호군(行上護軍)정난종(鄭蘭宗),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금니(金泥)로 사경(寫經)하게 하였는데, 이때 박경(朴耕)은 사정(司正)·사용(司勇)으로 참여하였다.

1477년(성종 8) 무렵에 박경은 사경(寫經)하는 일로 봉선사(奉先寺)에 다녀오다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宋氏)가 중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라는 방(榜)이 동대문(東大門)에 붙은 것을 보고 김일손(金馹孫)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박경이 김일손에게 이야기한 이 사실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일손의 자백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는 형신을 받고 7월 28일에야 석방되었다.

1507년(중종 2)에 행 호군(行護軍)심정(沈貞)·남곤(南衮) 등이 서얼(庶孽)박경(朴耕) 일당이 좌상(左相)박원종(朴元宗)·유자광(柳子光)·노공필(盧公弼) 등 임금의 측근을 제거하고, 정미수(鄭眉壽)를 영의정에, 김감(金勘)을 병조 판서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밀고하면서 옥사가 일어났다. 그 해 윤1월에 추관들이 함께 의계하기를, “박경·김공저 등은, 대신(大臣)을 모해하여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참형(斬刑)을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 박경과 김공저는 참형에 처하여졌다.

박경은 학문이 있고, 또 일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필가로서 글씨의 서법(書法)도 교묘하여 시책의 제목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한다.

참고문헌

  • 『예종실록(睿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석담일기(石潭日記)』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