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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6:42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양인의 가호.

개설

양호(良戶)는 조선시대 토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하던 양인 가호를 말한다. 다만 조선전기 양인(良人)은 양반 관료에서부터 일반 농민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다가 16세기 무렵부터 중앙 관료와 지방 사족이 점차 군역과 요역에서 벗어나 사회 지배층으로 입지를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국역 부담자 중에 비교적 재산이 많고 튼실한 농민 가호를 양호로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부터 조선의 건국 세력들은 과전법을 시행하여 권문세족과 사원에서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국가 수조지로 전환하고 상요(常徭)와 잡공(雜貢)을 폐지하여 일반 농민이 관부와 권세가로부터 침탈당하는 폐단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태종대에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하여 세력가들이 소유한 노비를 양인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인구를 늘리고 양인가호를 확대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다만 과전법이 서서히 폐지되고, 양인 내부에 계층 분화가 심화되면서 16세기 무렵부터 상층 양인에 해당하는 양반 관료와 지방 사족들의 토지 경영이 확대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국제전을 치르면서 토지 소유의 양상이 변화되었다. 즉 아문(衙門)이나 왕실 궁가에서 개간과 절수를 통해 토지를 겸병하는 한편, 일반 농민의 토지를 침탈하여 부실한 농민으로 구성된 양호의 수는 줄어드는 데 반해 지주의 작인(作人)이나 영세한 빈농은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군역은 양호에 부과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조선중기부터 역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자발적으로 세력가들에게 의탁하는 양호들이 나타났다(『중종실록』 15년 12월 21일). 양란 이후에는 중앙에 군문이 다수 신설되면서 양역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는 가운데 양호가 줄어드는 상황이 줄곧 문제시 되었다.

내용과 변천

주지하다시피 조선후기에는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문의 신설로 인해 중앙에 번을 서기 위해 상경하는 상번군(上番軍)과 이를 대신해 포를 납부하는 납포군(納布軍)의 확보가 절실하였다. 이 때문에 각 군문에서는 저마다 군액을 무리하게 설정하여 군현에 부과함으로써 양호가 적은데도 군액(軍額)은 턱없이 많은 폐단이 나타났다(『경종실록』 3년 1월 9일).

현실적으로 군역을 부과할 양호가 부족하자, 각 군문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과 죽은 사람에게 부과한 백골징포(白骨徵布), 이웃과 친족에게 거두는 인징(隣徵)·족징(族徵)과 같이 민간에 무리하게 군포를 징수하는 문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보다 큰 폐단은 양호의 경우 관권과 결탁하여 과중한 역에서 벗어나 가벼운 역인 헐역에 투속함으로써 가난하고 힘없는 빈잔호(貧殘戶)가 양역을 이중, 삼중으로 지게 되는 것이었다(『영조실록』 9년 12월 20일).

영조대 중반 무렵, 양역을 조사하여 군액을 정액화하고, 균역법을 제정하여 군포수를 2필에서 1필로 줄여주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빈잔호에 역이 편중되는 폐단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 나갔다. 그러나 조선후기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양호를 늘리는 정책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김성우, 「良賤制說의 대두와 조선초기 사회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韓國史硏究』146, 한국사연구회, 2009.
  • 김종수, 「17세기 軍役制의 推移와 改革論」, 『韓國史論』22, 서울대학교, 1990.
  • 이현수, 「조선초기 軍丁의 定額化 과정과 軍額 推移」, 『朝鮮時代史學報』26, 조선시대사학회, 2003.
  • 정연식, 「조선후기 ‘役摠’의 운영과 良役 變通」,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