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성(崔壽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22일 (금) 01:50 판




총론

[1487년(성종 18)∼1521년(중종 16) = 35세]. 조선 전기 중종 때의 사림파(士林派)의 서화가(書畵家).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강릉 출신인데, 만년에 경기도 평택(平澤) 진위(振威)의 남탄현(南炭峴)에 살았다. 자는 가진(可鎭)이고, 별호는 원정(猿亭), 자호는 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이다. 증조부는 세종 때 이조 참판최치운(崔致雲)이고, 조부는 대사헌(大司憲)최응현(崔應賢)이다. 아버지는 생원 최세효(崔世孝)이고, 어머니 삭년최씨(朔寧崔氏)는 승지(承旨)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승지최세절(崔世節)의 조카이고, 최수양(崔壽崵)과 최수몽(崔壽㠓)의 형이다.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기묘사화>와 최수성

13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된 아버지를 섬기면서 정성스레 그 뜻을 받들기에 힘썼으나, 아버지 최세효마저 일찍 돌아가서, 어린 나이에 몇 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상복(喪服)을 벗고 나자, 과거 공부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속세를 피하여 멀리 돌아다니며 이름난 산수를 두루 찾았는데, 당시 연산군 시대 정치가 혼란하여, 벼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평안도 희천(熙川)에 귀양살던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을 찾아가서 글을 배우면서 그 문하에서 김정·조광조·박상(朴祥) 등과 서로 좋은 벗이 되어 경전(經典)을 탐구하고 도의(道義)를 강론하니,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김굉필은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고 하여 극형을 받았다. 1505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하여 즉위한 중종은 초반기에 새로운 개혁 정치를 시도하였는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勳舊派)를 대신하여 재야의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최수성은 신진 사림파 사이에 비중이 큰 선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 친구들이 최수성에게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은일(隱逸)로 남겠다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평소 그는 산수화(山水畵)에 대한 취미가 있어서 두타산(頭陀山)·지리산(智異山)·속리산(俗離山) 등 여러 명산에 들어가서 한가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즐기었다.(『약헌집(約軒集)』 권14 「증영의정 원정 최공수성 행장(贈領議政猿亭崔公壽峸行狀)」, 이하 「행장」 약칭.)

1514년(중종 9) 중종의 둘째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인종(仁宗)을 낳다가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때 사림파의 김정과 박상 등이 <중종반정> 때 공신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하여 쫓겨난 첫째 부인 신씨(辛氏)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일 것을 주장하다가, 대사간(大司諫)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진 사림파의 영수 대사헌(大司憲)조광조가 대사간이행을 탄핵하여 마침내 이행을 파직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정 공신파와 신진 사림파가 크게 대립하였다.

도학(道學)을 중시하던 조광조는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1518년(중종13) 천거 방식의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였다. 이에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 등 28인을 추천하여 요직에 앉히고, 중종의 반정 공신 76명의 위훈(偉勳)을 삭감하여버렸다. 이에 격분한 훈구파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조광조와 김정·김식 등을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림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일찍이 남곤이 산수화를 한 점 김정에게 보내고 화제(畵題)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때마침 그 옆에 있던 최수성이 그 산수화를 보고 화제를 쓰기를, ‘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려가고 외론 연기 먼 나무에서 생기네. 두건 쓴 이 서너 명 있으니 그 누가 망천(輞川)의 주인인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망천은 당나라 왕유(王維)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평소 남곤은 그와 친한 친구 최세절로부터 조카 최성수가 자기들을 비난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지는 해”는 훈구파를 뜻하고, “두건 쓴 서너 명”은 사림파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이때부터 남곤은 최수성에 대하여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남곤이 죄인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이 되어 중종에게 청하기를, “조광조 등이 최수성을 선사(善士)로 여기고 태산(泰山) 북두(北斗)처럼 우러러보아, 그들이 조정에 진퇴(進退)할 때 반드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합니다. 최수성은 비록 초야의 선비로 이름이 났으나, 조광조가 나라를 그르친 근원은 모두 최수성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의 무리들과 별도로 음모를 꾸미려고 항상 김정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라고 권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내막이 있을 터이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최수성도 아울러 잡아들여 심문할 것을 청하니, 중종이 허락하였다.

남곤은 그를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하면서 심문하니, 그는 공초하기를, “사림파가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숙부 최세절에게 물러나라고 권한 것뿐입니다. 신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인데, 조광조와 무리를 지어 조정의 일을 의논할 리는 만무합니다. 김정의 무리에게 조정에서 물러나서 돌아가라고 권한 것도 신이 한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사림파가 모조리 붙잡혀 와서 고문을 당할 때, 좌의정안당(安塘)은 젊은 사림파의 인물을 변명하고,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사림파를 구원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최수성은 좌의정안당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최수성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김정·김식 등 그와 친한 친구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벼슬을 아예 포기하고 술과 여행, 시(詩)와 서화(書畵) 등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경기도 평택 진위의 남탄현에 집을 마련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원숭이 한 마리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므로, ‘원정(猿亭)’이라는 별호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면서 세상을 피하는 은사(隱士)라는 이름으로 살았는데, 숙부 최세절은 미친 은일로 살고 있는 조카 최수성을 매우 미워하였다.

<신사무옥>과 최수성

1521년(중종16) 남곤 등 훈구파는 좌의정안당의 서출 누이 감정(甘丁)의 아들 송사련(宋祀連)을 사주하여 <신사무옥(辛巳誣獄)>을 일으켜서 안당 일족을 멸족시켰다. 감정은 사예(司藝)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그 아들 안당의 서출 누이였다. 감정이 직장(直長)송린(宋璘)과 결혼하여 송사련을 낳았는데, 신분이 서출(庶出)이었던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과 고종사촌 간이었으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15년(중종10) 안당은 이조 판서가 되어 조광조·김식 등 젊은 사림파 인재를 천거하여, 훈구파와 대립하게 만들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사림파가 화를 당할 때, 좌의정안당은 사림파의 젊은 인재를 구원하려고 애써다가 결국 파면당하였다.

1521년(중종16) 송사련이 무고(誣告)하기를,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남곤·심정 등을 숙청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하자, 좌의정남곤이 안처겸과 동생 안처함(安處諴)을 함께 체포하였다. 혹독한 형벌로써 심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 그 형제를 함께 처형하고, 아버지 안당도 사사(賜死)시켰다. 이것이 <신사무옥>이다. 이 옥사는 남곤 등 훈구파가 송사련을 사주하여 꾸민 무고 사건인데, 송사련은 일등 공신이 되어 당상관(堂上官)시위대장이 되었다. 송사련의 아들 귀봉(龜峯)송익필(宋翼弼)은 뒤에 서인 이이(李珥)·성혼(成渾)·정철(鄭澈)와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노론 송시열(宋時烈)의 스승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을 가르친 사람이다.

1521년(중종 16) 10월 영의정김전(金詮)·좌의정남곤이 아뢰기를, “신 등이 전일에 최세절에게 듣건대, 그가 ‘최수성과 신잠(申潛)이 장차 대신들을 모해(謀害)하려고 한다.’ 했습니다. 그때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달(啓達)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보건대, 안처겸의 문건 속에 신잠의 이름도 끼어 있으니 아울러 추문(推問)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중중이 전교하기를, “먼저 승지최세절을 불러다가 추문하라.”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참고.) 남곤 등은 최수성과 신잠 등을 체포하여 여러 번 장형을 때려서 자복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이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함께 연행된 최세관(崔世寬)·권수중(權守中)·민간(閔簡)·이수견(李壽堅) 등도 형장(刑杖)을 맞고도 자복하지 않았다. 1521년(중종 16) 10월 21일 최수성은 신변과 함께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에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5세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참고.) 평소에 그를 따라다니던 이달형(李達亨) 등이 발[簾]로 시체를 염습하여 임시로 골짜기에 묻었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하권 참고.) 저술한 시문(詩文)은 많았으나, 흩어져서 다만 몇 수(首)의 시만 남아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뿐이다. 서화도 남아 있는 유작(遺作)이 거의 없다.

최수성과 숙부 최세절의 불화

최수성은 세종 시대 명신 최치운의 증손자이고, 대제학(大提學)최응현(崔應賢)의 손자였다. 대제학최응현은 아들을 5형제 두었는데, 둘째가 최수성의 아버지 최세효이고, 셋째가 최수성의 숙부 최세절이었다. 5형제 중에서 최세절만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일찍이 고아가 된 최수성의 4형제는 여러 숙부들의 도움을 받고 자랐다. 최세절은 사장파(詞章派)의 인물이었으므로, 훈구파 남곤 등과 사이좋게 지냈으나, 젊은 신진 사림파 조광조·김정 등과는 불화하였다. 그러므로 조카 최수성이 숙부 최세절에게 남곤을 비난하기를, “내가 그 사람됨을 보니, 정말로 소인(小人)입니다. 절대 교유하지 마십시오. 더구나 지금 여러 간신배들이 잔꾀를 부려서, 재앙의 조짐이 거듭 나타나는데, 사림파에게 큰 화가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숙부는 빨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하니, 최세절이 화를 내면서, “너는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나중에 화가 너에게 미칠까 염려된다.” 하였다. 최세절이 일찍이 그의 동료들에게 푸념하기를, “최수성이 나보고 벼슬에서 물러나서 쉬라고 권하는데, 나는 떠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니, 최세절을 미워하는 사람이 남곤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행장」 참고.)

최수성이 그의 숙부 최세절에게 보낸 시에, “가을의 강 위로 석양지고 있으니, 하늘은 싸늘하고 물결 절로 일어나네. 외론 배는 일찍이 정박을 해야 하니, 밤이 되면 풍랑이 많아질 테니까.[日暮秋江上 天寒水自波 孤舟宜早泊 風浪夜應多]”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중종이 국정을 잘못 운영하여 나라의 앞날이 위태롭다는 뜻이다. 최수성의 숙부 최세절이 그 시를 숨기지 않고 친한 동료들에게 보이고 그의 조카 최수성이 광망(狂妄)하다고 비난하였다. 마침내 그 시가 세상에 알려져서, 최수성은 마침내 <신사무옥>에서 남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최세절을 가리켜, “조카를 팔아서 이름을 얻었다.”고 비난하였다.(『중종실록』 참고.)

한편, 1521년(중종 16) 10월 <신사무옥>이 일어나서 최수성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대간에서 합사(合司)하여 최세절을 탄핵하기를, “승지최세절은 그의 조카 최수성이 죄를 범했는데도 측근의 자리에 있으니, 체직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최세절은 조카 최수성의 언행 때문에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최수성이 처형당한 뒤에도 최세절은 관찰사를 거쳐, 형조 참판·공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성품과 일화

최수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격은 시원스러워 얽매임이 없었다. 인간 세상에서 벼슬할 뜻이 없었고 뭇사람들과 달리처신하기를 힘쓴, 당대에 기이하고도 훌륭한 선비였다.(『기묘록보유』 하권 참고.) 송징은(宋徵殷)은 최수성의 행장(行狀)에 “흉금이 시원스럽고 기풍이 맑아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최수성은 마음이 활달하여 구애됨이 없었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는데, 허균(許筠)은 “원정최수성은 뜻을 고상하게 가져서,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므로 남에게 창찬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였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3-설부2 참고.) 이를 보면, 그는 매월당(梅月堂)김시습(金時習)처럼 미친 척 하면서 세상을 비판하고 권력자를 욕하던 시니컬한 개혁자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옷소매를 크게 하는 것을 숭상하여 그 모양새가 매우 넓었는데, 최수성은 일부러 소매가 좁은 옷을 만들어서 겨우 팔뚝 하나씩 들어가게 입었으므로,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벼슬길에 올라서 거드름을 피워보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대중과는 달리 좁은 옷소매를 입고 다니면서 온 세상에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1 참고.)

어려서부터 의기가 범상치 않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나이 9세에 문장과 예술이 이미 숙달하여,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도 잘 탔다. 그는 참으로 문학과 예술에 절세의 기이한 재주를 가졌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였고,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문장(文章), 서법(書法), 회화의 격식인 화격(畫格)과 음율(音律)이 모두 그 묘리(妙理)를 다하였고, 또 역학(易學)의 수리(數理)에도 정통하였다.(「행장」 참고.)

그는 시에도 능하고 그림에도 능하였는데, 충암(冲庵)김정이 일찍이 그의 시를 사랑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이름을 시문학에 남길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기묘사화> 이후에는 산사(山寺)로 돌아다니면서 유람하였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소나무로써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싫어지면 이것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기묘록보유』 하권 참고.)

어느 날 최수성이 동호(東湖)에 이르러 충암김정을 찾아가니, 김정이 부랴부랴 그를 맞이하여 술동이를 열어놓고 서로 즐겁게 술을 퍼마셨다. 술이 거나해지자, 김정이 송죽도(松竹圖)를 그려달라고 요청하니, 최수성이 술에 잔뜩 취하여 누워서 손과 발로써 그림을 그렸다. 김정이 이 그림을 곧바로 족자로 만들었다. 그 그림이 호당(湖堂)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정말로 천고에 뛰어난 필치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최수성이 그린 그림이 일찍이 내장고(內藏庫)에 걸려 있었는데, 왜인(倭人)의 사신이 그때마침 와서 최수성의 그림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다. 왜인 사자(使者)는 그 그림을 자기의 보검(寶劍) 한 쌍과 바꾸자고 청하며, “이 보검의 값이 3백 냥이나 나갑니다.” 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명(明)나라 사신이 왔을 때 최수성의 그림을 내보이니, 그 사신이 감탄하기를, “정말로 천하에 뛰어난 보배입니다.” 하였다.(「행장」 참고.)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의 일인데, 어느 날 김식이 조광조·김정 등 여러 친구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수성이 바깥에서 들어와서 오랫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말없이 서서 있다가, “나에게 술 한 잔을 줄 수 있겠는가?” 하므로 곧바로 술을 주니, 최수성이 단숨에 들이키고 말하기를, “내가 방금 낡은 배를 타고 가다가 회오리바람을 만나 거의 빠져죽을 뻔하였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는데, 지금 술을 마시니, 좀 풀렸다.” 하고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나가버렸다. 좌석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었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낡은 배란 우리들을 비유하여 가리킨 말인데, 그대들이 모른 것이다.”고 하였다. 그 뒤에 오래되지 않아서, 사화가 일어나서,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으므로 사람들의 모두 최수성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행장」 참고.)

신원과 후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묘소는경기도 평택 진위 남쪽 원정산(猿亭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데, 부인 한씨(韓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무덤 왼쪽에다 묻었다. 약헌(約軒)송징은이 지은 행장이 남아 있다.(『약헌집(約軒集)』 권14 「증영의정 원정 최공수성 행장(贈領議政猿亭崔公壽峸行狀)」) 인종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원도 강릉의 향현사우(鄕賢祠宇)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4 참고.)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판서한급(韓汲)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최수성의 셋째 동생 최수몽의 아들 최극흠(崔克欽)을 후사로 삼았는데, 군자시(軍資寺) 부정(副正)을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약헌집(約軒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패관잡기(稗官雜記)』
  • 『기년통고(紀年通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해동잡록(海東雜錄)』
  • 『포저집(浦渚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학포집(學圃集)』
  • 『정암집(靜菴集)』
  • 『송재집(松齋集)』
  •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 오세창,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계명구락부,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