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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총론

[1635년(인조 13)~1662년(현종 3) = 28세]. 조선효종(孝宗)의 수양딸. 원래 이름은 이애숙(李愛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봉호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인데, 기록에 따라서는 의신공주(義信公主)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금림군(錦林君)이개윤(李愷胤)이며, 어머니는 이개윤의 둘째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할아버지는 기성군(箕城君)이현(李俔)이다. 1650년(효종 1) 청(淸)나라 예충친왕(睿忠親王)과 결혼하였으나 예충친왕이 반역죄로 몰리면서 백양왕(百陽王)의 아들 보로(甫老)에게 분배되었다. 예충친왕은 예친왕(睿親王), 구왕(九王),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이라고도 한다. 보로가 죽고 몇 년이 지난 1656년(효종 7) 조선으로 돌아왔다.

예충친왕의 혼인 후보자 선출과 공주 책봉

1635년(인조 13)에 태어난 이애숙은 원래 금림군이개윤의 딸인데, 이개윤은 성종(成宗)의 아들인 익양군(益陽君)이회(李懷)의 후손이다. 그는 종친 태생이기는 하였으나 공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丙子胡亂)> 직후 조선이 청에 항복하면서 수용한 조건들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공주가 되었다. 당시 청이 요구한 조건들에는 명(明)과 단교(斷交)할 것, 왕자들을 인질로 보낼 것, 명에 사대(事大)하던 예법으로 청에 사대할 것 등과 함께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이것은 혼인을 통하여 양국의 우호를 증진하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청에서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혼인 상대를 청에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아울러 그들을 볼모로 잡겠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혼인 상대로 자신들의 신분과 격식이 맞는, 즉 재상 이상의 자식을 그 상대로 지명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결국 이 조건은 효종 대에 예충친왕이 아내를 잃고 새로 혼인을 하려 하면서 실현되었고, 이 과정에서 애숙은 의순공주(義順公主)로 책봉되었다.

청이 조선에 처음으로 혼인 상대를 보내라고 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난 바로 그 해로, 1637년(인조 15) 겨울에 칙사를 보내 ‘재상의 자녀가 결혼하는 일’을 빨리 결정하라고 통보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친자식과 양자를 차별하지 않는 청의 관습을 고려하여, 대신 가운데 하인의 딸을 수양딸로 삼은 후, 그들을 혼인 상대 후보자로 내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두어 기르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몇 년의 유예 기간을 갖기로 하였는데, 그런데 비록 수양딸 혹은 서녀라고 하여도 괜찮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혼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자체가 굴욕이며 치욕인 까닭에 조정 대신들 모두 이를 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간신히 5명의 혼인 후보자를 뽑을 수 있었으나, 이후 청에서 이 일에 관하여 특별한 재촉을 하지 않으면서 이 혼인은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3년 후인 1650년(효종 1) 3월 청은 파흘내(巴訖乃)를 대표로 하는 칙사 일행을 보내 다시 혼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예충친왕의 통혼칙(通婚勅)을 지니고 있던 그들은 ‘예충친왕이 아내를 잃어 국왕과 혼인을 하려 한다’면서, 효종의 누이나 딸, 효종과 가까운 친척의 딸, 또는 대신의 딸 가운데 후보자를 선출하라고 하였다. 당시 효종에게는 결혼할 수 있는 연령인 11세의 공주가 있었으나, 공주를 보내면 바로 인질이 되기 때문에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효종과 가까운 친척의 딸이거나 대신의 딸 가운데에서 후보자를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도 인조 때와 마찬가지로, 대신들은 자신의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런 가운데 청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조선에서는 어렵사리 15명의 후보자를 선발하였고,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당시 16세이던 애숙이었다.

애숙은 종친이었던 아버지 금림군이개윤이 당시 자진해서 자색(姿色)이 있는 딸이 있음을 효종에게 알리면서 혼인 후보자로 선발되었다. 이를 두고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에서는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이개윤이 자신의 딸을 예충친왕과 혼인 시킨 것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는 비단에 눈이 멀어 딸을 보낸 것이며, 이 덕분에 가난한 살림을 일으켜 부자가 되었다고 악평하였다. 이것에 대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한편으로는 이개윤이 종친이므로 종부시(宗簿寺)에서 가족 사항들을 관리하였다는 점에서, 애숙의 존재를 숨기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후 청의 칙사들은 애숙을 포함한 혼인 후보자들을 심사한 끝에, 당시 16세이던 애숙을 혼인 당사자로 결정하였다.

애숙의 아버지 금림군은 성종의 4대 후손이고, 효종은 성종의 6대 후손이므로, 금림군이개윤은 효종의 10촌 할아버지뻘이었다. 이에 따라 애숙은 효종의 11촌 고모뻘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예충친왕에게 보내기 위하여 애숙을 수양딸로 삼았다. 이어 3월 25일 효종은 애숙을 공주로 봉작하고, 봉작명을 ‘의순(義順)’이라 하였다. 아울러 이개윤에게는 가덕(嘉德)의 품계가 더해졌으며, 의순공주가 청으로 떠난 후에 그의 오빠들인 이준(李浚)과 이수(李洙)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한편 공주로 봉작되고 약 한 달 후인 4월 22일, 의숙공주는 효종을 비롯한 재상과 백성들의 환송을 받으며 예충친왕과 혼인하기 위하여 청으로 떠났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서는 당시 분위기에 대하여 모두 비참해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청에서의 생활

의순공주는 시녀 16명과 여의(女醫), 유모, 몸종, 수모(首母), 그리고 호행사(護行使)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청으로 떠났다. 그리고 5월 21일 산해관(山海關) 부근의 연산(連山)에서 예충친왕을 만나, 첫날밤을 보내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39세로 의순공주보다 23세가 더 많았던 예충친왕은 처음에는 의순공주를 꽤 마음에 들어 했으나, 연경(燕京: 북경)으로 옮긴 후에는 공주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불평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연려실기술』에서는 공주가 소박을 맞았다고 하였는데, 예충친왕이 죽은 후 의순공주가 취한 행동을 보면 다소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싶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따르면 의순공주는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예충친왕을 몹시 그리워하여 무당을 시켜 그의 혼을 불러낼 정도였다는 것이다. 또한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도 예충친왕이 의순공주에 대하여 ‘백송골(白松鶻)’이라 칭하며 기뻐하였다고 하는데, ‘백송골’이란 ‘흰 빛깔의 매’란 뜻으로 그 자태가 뛰어남을 전한다는 기사의 내용을 보아도 예충친왕과 의순공주의 사이가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혼인을 치른 7개월 후인 그 해 12월 예충친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의순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예충친왕의 반대파에서 그가 살아있을 때 역모를 계획하려 했다는 의혹을 내세우면서, 결국 예충친왕은 존호를 삭탈당하고 태묘에서 축출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충친왕의 부인들은 다른 왕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의순공주는 백양왕의 아들 보로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보로마저 1년 후에 사망하면서, 결국 의순공주는 타지에서 외롭게 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사신으로 청을 오고 가던 의순공주의 아버지 이개윤은 1656년(효종 7) 청의 황제인 세조(世祖)에게 의순공주를 돌려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이를 수락하면서 의순공주는 그 해 4월 26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어 몇 달 뒤인 7월 효종은 의순공주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여 세조에게 「사출송의순공주표(謝出送義信公主表)」와 예물을 함께 보냈다.(『동문휘고(同文彙考)』 원편, 권79 참고.)

귀국 후의 생활

6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의순공주를 위하여 효종은 호조에 명령하여 매달 쌀을 지급하도록 하는 등 조선을 위하여 희생한 의순공주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 썼다. 그러나 귀국 이후 의순공주의 삶은 청에서와 마찬가지로 순탄치 않았다. 사헌부(司憲府)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개윤이 조정과 상의하지 않고 세조에게 글을 올려 의순공주를 데려왔다며 그의 삭탈관작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처음 효종은 이 주장에 따르지 않았으나, 계속된 조정 대신들의 주장에 결국 이개윤을 삭탈관작한 후 성문 밖으로 쫓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개윤은 다시 청국진하정사(淸國進賀正使) 등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 모든 파란을 겪으며 건강을 해친 의순공주는 1662년(현종 3) 8월 6일, 조선에 돌아와서 거주하던 의정부 금오리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이러한 의순공주를 불쌍히 여겨, 의순공주의 장례식을 치룰 수 있도록 넉넉하게 장례 관련 물품을 보내도록 하였다.

정명수와의 일화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의순공주는 예충친왕과의 혼인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였으며, 애국심 또한 깊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는 의순공주와 정명수(鄭命壽) 사이에서 발생한 일화가 실려 있다.

청에서는 예충친왕의 배우자를 데려오는 일로 정명수를 조선에 보냈는데, 정명수는 원래 조선인으로 명과 후금(後金)의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후금의 포로가 된 인물이었다. 이후 조선 포로들은 석방이 되었으나, 정명수는 조선에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남아 청의 역관이 되어 청의 조정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명수는 조선에 올 때마다 권세를 부리며 조선인들을 괴롭혔는데, 의순공주를 데리러 와서도 악행을 저지르며 은화를 빼앗고자 하였다. 그러자 의순공주가 정명수를 불러, 자신이 예충친왕과 혼인을 한 후 정명수에 대하여 알리면 목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꾸짖으며, 곤장을 치려고 하자, 정명수가 겁을 내어 죽기로 간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들은 조선 사람들은 의순공주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정명수의 콧대를 꺾었다며,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정주당 놀이

의순공주의 묘역은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의 천보산 기슭에 있는데,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1쌍의 문인석이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은 ‘족두리묘’로도 불리는데, 이는 의순공주의 죽음과 관련된 야사에서 기인한다. 예충친왕과 혼인하기 위하여 청으로 가던 의순공주는 국경인 정주(靜州)에 도착하여 수행원들이 잠시 쉬고 있을 때, 조선을 짓밟은 오랑캐에게 몸을 줄 수 없다 하여 벼랑 아래 강물로 투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의순공주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 하였고, 족두리만 찾는 바람에 그 족두리로 의순공주의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의순공주의 묘역은 ‘족두리묘’로도 불렸던 것이다.

또한 이 전설과 연관하여 이 마을의 ‘정주당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강에 투신하여 불쌍하게 죽은 의순공주의 넋을 위로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이후 마을에서는 매년 봄마다 행사를 거행하였는데, 이것이 점차 발달하여 ‘정주당 놀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주당은 의순공주가 정주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의순공주의 어머니가 국경인 정주를 바라보며 딸의 명복을 빌었다는 사당을 일컫는 것으로 천봉산 내에 위치하고 있다. 정주당 놀이는 현재도 매년 봄마다 거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동문휘고(同文彙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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