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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3 판




총론

[1736년(영조 12)~1801년(순조 1) = 66세]. 조선 후기 성호학파의 학자이자 초기 천주교 신자 중 한 사람. 자는 기명(旣明)이고, 호는 녹암(鹿庵)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경기도 양근이고,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이다. 할아버지는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낸 권적(權蹟)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권흠(權欽)이다.

영조~순조 시대 활동

증조부 권흠이 1693년(숙종 19)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나, 이듬해인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발생하면서 관직을 잃고 경기도 양근으로 낙향한 이후 실세한 남인(南人)계 집안에서 태어난 권철신(權哲身)은 일찍부터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학(經學) 탐구에 몰두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1759년(영조 35) 이익(李瀷)의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기호남인계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의 학문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이병휴(李秉休)·안정복(安鼎福)·신후담(愼後聃)·홍유한(洪儒漢)·이기양(李基讓) 등이 있다. 이익·이병휴의 사망 후에는 녹암계(鹿庵系)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의 문하에 들어온 이들은 이총억(李寵億)·홍낙민(洪樂敏)·이승훈(李承薰)·정약용(丁若鏞) 형제 등이었다. 그는 정통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 등을 깊이 탐구하며 자유로운 경전해석을 통한 자주적인 학문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바탕 하에 권철신은 학문으로서의 서학(西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이것을 신앙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는 1784년(정조 8) 천주교 서적을 들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믿게 되었으나, 눈에 두드러지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천주교 문제가 거론될 때면 권철신은 언제나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제사를 모시지 않으면서 촉발된 <신해박해(辛亥迫害)>로 동생 권일신(權日身)이 사망하고, 1800년(순조 즉위년)에는 양자 권상문(權相問)도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발하자 권철신에 대한 비판이 조정 내에 올라오게 되었고, 결국 그는 그해 2월 11일 양근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후 신문과정에서 배교로 일관하였으나, 2월 중순에 매를 맞아 사망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2월 18일),(『순조실록』 1년 2월 21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순조 1년 2월 18일],[『승정원일기』순조 1년 2월 19일],[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5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

한편 그의 저서로는 『시칭(詩稱)』과 『대학설(大學說)』 등이 있다.

후손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남돈(南墩)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이총억(李寵億)의 처가 되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 권일신의 2남 권상문을 양자로 들였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