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문헌|대표표제=대명일통지|한글표제=대명일통지|한자표제=大明一統志|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대명지서(大明志書), 명일통지(明一統志), 지리총지(地理總志)|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문헌|지역=중국|시대=명|왕대=|집필자=한지선|저편자=|간행처=|간행년일=1461년(천순 5) 4월|권책수=90권|사용활자=|표제=|소장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69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3005_001 『성종실록』 19년 3월 5일]}}
+
{{서명사전|대표표제=대명일통지|한글표제=대명일통지|한자표제=大明一統志|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지리서|유형=한문|지역=중국|시대=명|왕대=|집필자=성낙수|저편자=이현 등|간행처=|간행년일=|권책수=90권 50책|사용활자=|표제=|소장처=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70000141|실록연계=}}
  
명대 관찬 지리총지.
+
중국 명(明)나라에서 발간된 지리서(地理書).
  
 
=='''개설'''==
 
=='''개설'''==
  
명대 찬수된 전국 지리총지로 1461년 완성되었다. 이 책은 1370년(홍무 3) 찬수한 『대명지서』를 토대로 완성되었다. 이 책은 명대 행정 구역의 유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이웃 국가의 풍속·지리·문화 등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이 지리지에서 언급한 내용상의 오류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조선의 실상이 현실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이 있다고 하여 외교적으로 수정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의 지리와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습득할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는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본떠서, 중국의 명()나라 때에 국가사업으로 임금의 명으로 편찬한 지리서다. 총 90권으로 전 영토의 지리를 행정구획 별로 기술하였고, 말미에는 주변의 아시아 각국이 부가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발간 경위'''==
  
1458년 영종(英宗)이 이현(李賢) 등에게 중수를 명하여 1461년 4월에 완성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초 1370년 태조 홍무제는 위준민(魏俊民)·황지(黃篪)·유엄(劉儼)·정봉(丁鳯) 등에게 명하여 『대원대일통지(大元大一統志)』의 체계에 따라 『대명지서(大明志書)』를 찬수하도록 하였고 이후 1384년에 『대명청류천문분야서(大明淸類天文分野書)』를 찬수하기도 하였다. 토목보의 변[土木─變] 이후 제위에 오른  대종(代宗) 경태제는 제위 연간에 전국 지리총람으로서 『환우통지(寰宇通志)』를 찬수하게 하였는데 양경 및 13포정사사 그리고 149개의 부()를 편목하였고 건치·연혁·군명·형세·풍속·산천·토산 등 38개의 항목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1457년 탈문의 변[奪門之變]을 통하여 복위한 영종은 경태 연간의 총지가 간략하고 번거로움이 마땅하지 않고 취하고 버림 역시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현(李賢) 등에게 중수를 명하여 1461년(천순 5)에 완성하였다. 영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대명일통지』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홍치 연간과 만력 연간에도 재차 수정되면서 건치 관련 내용이 증가되었다.
+
원래는 90권으로 중국 명나라의 이현(李賢)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것이며, 1461년(天順 5)에 완성하였다. 청(淸)나라에서는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라 하여 간행하였는데, 천순본(天順本)을 고쳐 실은 부분이 있다. 간본(刊本) 중에는 1461년의 경창대자본(經廠大字本)이 가장 잘 되었다
 +
 
 +
우리나라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만들 때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였으며, 체재는 남송(南宋)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나라의 대표적 통지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하였다.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ㆍ풍속ㆍ인물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예에 따라 고적편목이 신설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는 없는 성씨ㆍ봉수(烽燧)의 양조도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에 임사홍(任士洪)ㆍ성현(成俔)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에 착수하였다.
  
 
=='''서지 사항'''==
 
=='''서지 사항'''==
  
판본으로 1461년의 만수당(萬壽堂) 각본이 있고 1505년의 신독재(愼獨齋) 각본, 1588년의 귀인재(歸仁齋) 각본,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이 있다. 1983년 대만(台湾) 상무인관(商務印館)에서 대연각사고전서본(文淵閣四庫全書本)을 영인하였다.
+
90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6.1cm, 가로 16.3cm이며,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구성/내용'''==
  
이 책은 『대원대일통지』의 체제를 연용하여 명의 행정 구획을 대강으로 하여 분권하고 항목을 세웠다. 권1~5는 경사(京師), 권6~18은 남경(南京), 권19~21은 산서(山西), 권22~25는 산동(山東), 권26~31은 하남(河南), 권32~37 섬서(陝西), 권38~48은 절강(浙江), 권49~58은 강서(江西), 권59~72는 호광(湖廣), 권73권은 육번초토사사(六番招討使司), 권74~78은 복건(福建), 권79~82는 광동(廣東), 권83~85는 광서(廣西), 권86~87은 운남(雲南), 권88은 귀주(貴州)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경·남경의 양경과 13포정사사는 모두 부·직예주와 현으로 나누어 건치, 연혁, 군의 이름, 지세, 풍속, 산천, 토산, 서원, 고적, 인물 등 수십여 개의 항목을 기재하였다. 이 외에도 권89와 90은 외이(外夷)의 각국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대명일통지』는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고금을 관통하여 전국의 각 지역의 자연과 사회, 역사와 현황에 관한 각종 정황을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이웃 나라도 아울러 언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명일통지』가 오류가 있음이 종종 지적되었는데 특히 조선의 풍속에 대한 기록이 관료들의 유교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으므로 명의 사신을 통하여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3005_001 『성종실록』 19년 3월 5일]).
+
책머리에는 이행의 진전문(進箋文)ㆍ서문ㆍ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의 노사신(盧思愼)의 진전문, 서거정(徐居正)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ㆍ찬수관직명ㆍ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끝에는 홍언필ㆍ임사홍ㆍ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
 
 +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본떠서, 명나라의 중국 전역과 조공국(朝貢國)의 지리를 기술한 총지(總志)이며, 각종 지도를 게재한 다음, 풍속ㆍ산천 등 20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456년(景泰 7) 편찬된 『환우통지(寰宇通志)』(119권)를 요약한 것이라는 말을 입증하듯이 기술이 간략하고 정확하지 않으나, 당시에 편찬된 얼마 남지 않은 지지로서 중요하다.
 +
 
 +
이 책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록한 부분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개원현은 옛 부여 지역으로 발해 때는 부여부, 요나라 때는 황룡부, 금나라 때는 함평부,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 명나라 때는 삼만위였다.”
 +
 
 +
“영고탑은 옛 읍루국(挹婁國)이며, 발해 때는 용천부, 요나라 때는 여진국, 금나라 때는 회령부, 원나라 때는 수달달로(水達達路), 명나라 때는 모련위(毛憐衛)였다.
 +
 
 +
또한 “중국이 세운 만리장성위로 압록강이 지나간다.”고 하여, 요하가 압록임을 알 수 있다. 요하의 여러 줄기 중에 소요수 즉 난하와 연결되는 것도 있다. 아울러 고려 땅임도 알 수 있다. 연산도부터 고려 땅이 시작되기에 지도의 연산이 가까운 곳에서 고려 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평양성’이 압록강의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라고도 하며, 바로 기자(箕子)의 옛 나라로, 성 바깥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진(晉)나라 의희(義煕) 연간 이후로는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이 성에 거주하였다. 그 뒤에는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가 되었다.”
 +
 
 +
“기자묘는 유성 즉 조양에 있다. 평양성은 이곳에 있으며 이곳이 한 때는 고구려의 수도였다.”
 +
 
 +
“금(金)나라에서는 파속로통군사(婆速路統軍司)를 설치하였는데, 원(元)나라에서 파속로를 잘못 파사로(婆娑路)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파사부로(婆娑府路)를 설치하였다가, 지원(至元) 17년(1280)에 고쳐서, 동경 총관부(東京摠管府)에 예속시켰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파사부는 도사성(都司城)에서 동쪽으로 47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
 
 +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라고 하였다. 옛 회령부라함은 금나라의 수도를 말함이다. 즉 명나라가 생각한 장백산은 만주 중앙부근에 있는 것으로 아마도 평정산이 제일 유력하다.
 +
 
 +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소정방이 포위한 평양성은 조양이다.”라든가,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원래 고려의 경계가 평양성 동쪽 160리라고 한다. 즉 조양의 동쪽 160리이다.”라든가, “살수는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의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옛 이름은 살수이다.”하는 등의 기록이 『대명일통지』에 남아 있어,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黃卓越·桑思奮 주편, 『中國大書典』, 中國書店, 1994.       
+
*공원국, 『장부의 굴욕』, 위즈덤하우스, 2009.       
*박인호, 「명·청대 중국 지리서에 나타난 대조선 역사지리인식: 조선시기 역사지리 연구의 추이와 관련하여」, 『경북사학』 21, 경북사학회, 1998.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張英聘, 「論《大明一統志》的編修」, 『史學史硏究』, 2004-04.       
+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한길사, 2001.       
  
 
=='''관계망'''==
 
=='''관계망'''==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5691"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70000141"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문헌]][[분류:중국]][[분류:명]][[분류:명]]
+
[[분류:지리서]][[분류:한문]][[분류:중국]][[분류:명]]

2017년 12월 22일 (금) 01:21 판



중국 명(明)나라에서 발간된 지리서(地理書).

개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는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본떠서, 중국의 명(明)나라 때에 국가사업으로 임금의 명으로 편찬한 지리서다. 총 90권으로 전 영토의 지리를 행정구획 별로 기술하였고, 말미에는 주변의 아시아 각국이 부가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원래는 90권으로 중국 명나라의 이현(李賢)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것이며, 1461년(天順 5)에 완성하였다. 청(淸)나라에서는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라 하여 간행하였는데, 천순본(天順本)을 고쳐 실은 부분이 있다. 간본(刊本) 중에는 1461년의 경창대자본(經廠大字本)이 가장 잘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만들 때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였으며, 체재는 남송(南宋)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나라의 대표적 통지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하였다.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ㆍ풍속ㆍ인물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예에 따라 고적편목이 신설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는 없는 성씨ㆍ봉수(烽燧)의 양조도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에 임사홍(任士洪)ㆍ성현(成俔)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에 착수하였다.

서지 사항

90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6.1cm, 가로 16.3cm이며,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책머리에는 이행의 진전문(進箋文)ㆍ서문ㆍ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의 노사신(盧思愼)의 진전문, 서거정(徐居正)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ㆍ찬수관직명ㆍ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끝에는 홍언필ㆍ임사홍ㆍ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를 본떠서, 명나라의 중국 전역과 조공국(朝貢國)의 지리를 기술한 총지(總志)이며, 각종 지도를 게재한 다음, 풍속ㆍ산천 등 20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456년(景泰 7) 편찬된 『환우통지(寰宇通志)』(119권)를 요약한 것이라는 말을 입증하듯이 기술이 간략하고 정확하지 않으나, 당시에 편찬된 얼마 남지 않은 지지로서 중요하다.

이 책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록한 부분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원현은 옛 부여 지역으로 발해 때는 부여부, 요나라 때는 황룡부, 금나라 때는 함평부,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 명나라 때는 삼만위였다.”

“영고탑은 옛 읍루국(挹婁國)이며, 발해 때는 용천부, 요나라 때는 여진국, 금나라 때는 회령부, 원나라 때는 수달달로(水達達路), 명나라 때는 모련위(毛憐衛)였다.

또한 “중국이 세운 만리장성위로 압록강이 지나간다.”고 하여, 요하가 압록임을 알 수 있다. 요하의 여러 줄기 중에 소요수 즉 난하와 연결되는 것도 있다. 아울러 고려 땅임도 알 수 있다. 연산도부터 고려 땅이 시작되기에 지도의 연산이 가까운 곳에서 고려 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이 압록강의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라고도 하며, 바로 기자(箕子)의 옛 나라로, 성 바깥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진(晉)나라 의희(義煕) 연간 이후로는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이 성에 거주하였다. 그 뒤에는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가 되었다.”

“기자묘는 유성 즉 조양에 있다. 평양성은 이곳에 있으며 이곳이 한 때는 고구려의 수도였다.”

“금(金)나라에서는 파속로통군사(婆速路統軍司)를 설치하였는데, 원(元)나라에서 파속로를 잘못 파사로(婆娑路)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파사부로(婆娑府路)를 설치하였다가, 지원(至元) 17년(1280)에 고쳐서, 동경 총관부(東京摠管府)에 예속시켰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파사부는 도사성(都司城)에서 동쪽으로 47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라고 하였다. 옛 회령부라함은 금나라의 수도를 말함이다. 즉 명나라가 생각한 장백산은 만주 중앙부근에 있는 것으로 아마도 평정산이 제일 유력하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소정방이 포위한 평양성은 조양이다.”라든가,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원래 고려의 경계가 평양성 동쪽 160리라고 한다. 즉 조양의 동쪽 160리이다.”라든가, “살수는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의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옛 이름은 살수이다.”하는 등의 기록이 『대명일통지』에 남아 있어,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공원국, 『장부의 굴욕』, 위즈덤하우스, 2009.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한길사,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