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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주민들의 거주 및 생산 활동 공간인 마을 공동체.

개설

촌락(村落)은 생활용수, 산업, 교통 등 제반 생활 기반을 공유하면서 가옥 구조나 형태, 촌락 경관, 생산 활동 등 생활 공동체로써의 동질성을 확보함으로써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촌락은 입지 조건과 발달 요인에 따라 거주하는 인구수나 주민들의 직업과 기능, 주변 경관 등에서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촌락은 가호(家戶)의 규모에 따라 대촌·소촌으로 구분되며, 주요 산업에 따라 농촌·어촌·산지·광산·역촌 등으로 구분된다. 인구의 밀집 정도에 따라 산촌(散村)·집촌(集村)으로 구분되며, 구성원들의 신분에 따라 민촌(民村)·반촌(班村) 등으로 구분되고, 구성 형태에 따라 괴촌(塊村)·환촌(環村)·노촌(路村)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촌락은 국가의 통치 대상이 되었다. 군현 체제의 하부 조직인 면리제로 편제된 촌락은 촌(村)·동(洞)·리(里)로도 불렸고, 촌주(村主)·이정(里正) 등 이임(里任)이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정조실록』 2년 1월 10일]. 면리 체제는 지역촌을 위주로 편제되었고 지역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었다.

자연촌의 성장은 지역촌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사회 경제적 발달에 편승하여 자연촌의 역량이 강화되면서 지역촌은 분화 내지 분동(分洞) 형태로 재편되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이러한 추세는 촌락이 부세의 단위로 설정되어 공동납 형태가 전개되면서 한층 촉진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초기에는 4면촌락(四面村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26일). 동서남북의 방위를 염두에 둔 호칭이었다. 여말 선초에 이족(吏族)에서 분화한 사족들은 대부분 읍치(邑治) 외곽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이들은 당시의 새로운 농법을 원용하여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회상은 읍치를 중심으로 4면 촌락의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행정 편제는 도(道)-읍(邑)-촌(村)-리(里)로 파악되기도 한다[『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이 점은 촌과 리 단위가 별개로 파악되었으며, 이것은 촌이 면 단위의 호칭과 혼용되었던 양태를 의미한다. 또한 아직은 면리제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이며 아울러 읍치 외곽의 촌락 발달이 미숙했음을 반영한다. 이 시기 읍치 중심의 성황제의 의례화가 강조되었던 것도 이러한 양상을 반영한다.

성리학과 종법 질서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촌락 사회에는 집성촌(集成村)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이전 시대의 양측적(兩側的) 친족 구조가 극복되고 부계 친족 중심의 가계 및 재산 상속이 보편화되면서 촉진되었다. 아울러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이어 퇴계향약과 율곡향약이 보급되면서 관혼상제를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향약 질서가 보편화 되어 갔던 것이다[『정조실록』 21년 6월 20일].

변천

조선후기 새로운 농법의 도입과 새로운 경작지의 확보, 인구의 증가 등 사회 경제적 발전에 힘입어 촌락 사회가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 추세에 기반을 두고 촌락은 분동(分洞)하거나 신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그 규모와 입지에 따라서 대촌과 소촌, 반촌과 민촌, 농촌과 어촌·산촌, 부촌과 빈촌, 상촌과 하촌 등으로 다양하게 분별되었다. 아울러 두레·향약(鄕約)·계(契) 등의 사회 조직이 촌락 사회로 확산되면서 촌락은 생활 공동체로써 결속을 이루었다(『정조실록』 21년 6월 2일).

또한 촌락 사회는 주민들의 결속력을 높이고 내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신앙 기제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산신당(山神堂)·성황당(城隍堂)·별신당(別神堂) 같은 신앙 체계가 그것이다. 성황당은 마을마다 설치되었고, 산신당은 산자락에 형성된 촌락들이 공유하였으며, 바닷가 어촌 마을에는 별신당이 마련되었다.

부세의 공동납 체제하에서 촌락은 수취 단위가 되었다. 공동납은 촌락 단위에서 책임 납부하는 형식으로써, 먼저 각 면 단위로 총액이 분정(分定)되면 다시 촌락 단위로 분정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영 체계에서 촌락 사회 초미의 관심사는 부세 분정의 균형이었다. 이웃 마을과 비교하여 부세가 가혹하다는 불평이 수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빈촌이나 소촌을 대촌이나 부촌과 합동하는 형태로 동계(洞契)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는 동계가 부세 운영 단위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부세의 균형적인 분정을 위한 촌락 사회의 자구책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조선후기 자연촌의 성장은 민의 의식 성장을 수반하였고, 이러한 물적·의식적 측면의 성장을 기반으로 촌락은 공동의 생활권이면서 연대 의식을 가진 민의 삶의 터전으로써 자치적인 성향을 강하게 키워 갔다.

참고문헌

  • 이해준,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민족문화사, 1996.
  • 구산우, 「중세의 지역촌과 자연촌」, 『역사비평』30, 1995.
  • 김무진, 「조선 전기 촌락의 형성과 촌락사회의 제세력」, 『국사관논총』30, 1991.
  • 김재홍, 「농경 사회의 형성과 고대의 촌락」, 『역사비평』30, 1995.
  • 박종기, 「고려시대 촌락의 기능과 구조」, 『진단학보』64, 1987.
  • 윤해동, 「일제의 지배 정책과 촌락 재편」, 『역사비평』30, 1995.
  • 정진영, 「조선 후기 동성 촌락의 형성과 발달」, 『역사비평』30,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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