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궤(犒饋)"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잔글 (Tutor님이 호궤(牛高 饋) 문서를 호궤(犒饋)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한자표기 수정)
 
(차이 없음)

2022년 9월 5일 (월) 15:15 기준 최신판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호위하는 군사들이나 화성(華城) 축조와 같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관원, 일군 등에게 술과 음식을 주어 이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것.

개설

호궤는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호위하는 군사들이나 주요한 일을 담당하는 관원과 일군 등에게 술과 음식을 주어 이들을 위로하는 행사이다. 이 행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으며 조선후기 국왕이 교외로 거둥할 때 주정소(晝停所: 한자 추가)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거나 귀환한 이후 궁궐 주변에서 이들에게 음식을 지급하여 위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는 그 음식 비용을 호조에서 담당하였으나 17세기 이후에는 각 군영에서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래는 술과 음식으로 호궤하였는데 1778년(정조 2) 임금이 군사들의 진법 훈련인 열무(閱武)에 참여한 뒤 모화관(慕華館)에서 음식을 먹인 이후에는 군사들에게 대금으로 나누어 주도록 병조에서 규례를 제정하였다. 그 비용은 장졸 1인당 2전 7푼씩이었다.

연원 및 변천

호궤하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개국 직후인 1397년(태조 6) 5월에 호궤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교외로 거둥할 때 수행하는 주요 군영의 군병을 호궤하는 경우 그 음식 비용은 최초에는 호조에서 지급하였다. 그 비용은 장졸 1인당 2전 7푼씩이었다. 이전에는 대체로 임금이 거둥할 때에 낮에 머무르는 주정소에서 음식을 주었으나 이후에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예를 들어 훈련도감의 경우 1677년(숙종 3) 임금이 숭릉(崇陵)을 참배하고 귀환한 뒤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급여했고 1759년(영조 35)에 임금이 직접 돈화문(敦化門)에 나와서 음식을 급여했는데, 이듬해부터는 계속 대금으로 그 비용을 지급하였다. 연초에 임금이 음식을 내려 줄 때 사용하는 전포(展布)는 훈련도감에서 준비하였다. 어영청의 경우도 비슷한데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장관(將官) 이하의 군병에게는 최초 호조에서 지급하였는데 1684년(숙종 10) 이후부터는 어영청에서 그 경비를 부담하였다. 호궤는 대개 음식으로 하였는데, 1778년(정조 2) 임금이 군사들의 진법 훈련인 열무에 참여한 뒤 모화관에서 음식을 내린 이후에는 대금으로 나누어 주도록 병조에서 규례를 제정하였다.

절차 및 내용

조선후기 호궤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현재 규장각에 보관 중인 자료로서 총융청(摠戎廳) 소속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호궤 행사의 의식 절차를 정리한 홀기(笏記)인 『호궤의주(犒饋儀注)』 등에 그 내용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호궤하기 전날 전설사(典設司)에서 세마평(洗馬坪) 단상(壇上)에 임금이 머무는 막사인 어막(御幕)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행사 당일 대가(大駕)가 군문인 원문(轅門) 밖에 도착하면 선전관(宣傳官)이 무릎을 꿇고 징을 두 차례 울리고 대취타 할 것을 아뢴다. 이어서 원문을 열고 대가가 장대에 도달하여 올라가 앉게 된다. 이후 음악이 연주되고 이어 군사들을 먹이고, 진법을 행하고 이어서 임금이 환궁하는 절차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음악의 연주는 호궤하기 전에는 무환지악(武桓之樂)과 징각지악(徵角之樂)을 연주하고, 호궤한 이후에는 군악(軍樂), 여민악(與民樂), 그리고 영산회상(靈山會象)을 사용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후기 호궤 행사의 규모는 매우 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95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에 행차하여 한성으로 돌아온 지 5일이 지난 윤2월 21일 창덕궁춘당대(春塘臺)에서 어가를 따라갔다 온 신하와 장교 및 군졸에 대한 호궤가 벌어졌는데, 이날 정조는 융복을 입고 말을 타고 춘당대에 도착하여 전교를 내려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마음껏 마실 것을 명하였다.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3,846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에게는 각각 흰 떡 3개, 대구어 1편, 황육자(黃肉炙) 1곶, 그리고 술 한 그릇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이 밖에 건호궤(乾犒饋)라 하여 정리소(整理所), 장용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의 대장 이하 장교 및 군병 3,536명에게 일률적으로 돈 2전 7푼이 지급되었다. 이 비용은 정리소에서 지급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호궤의주(犒饋儀註)』
  •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