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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홍익만|한글표제=홍익만|한자표제=洪翼萬|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천주교도|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영조~순조|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사망=1801년(순조 1) 12월 26일|본관=남양(南陽)|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증조부= 홍경렴(洪景濂) |조부= 홍상빈(洪尙賓) |부= 홍첨(洪瞻) |모_외조=|형제=|처_장인=|자녀=(딸)홍필주(洪弼周)의 처, 이현(李鉉)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15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2026_001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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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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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순조 시대 활동'''==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서울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홍익만(洪翼萬)은 경기도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정조 14)을 전후하여 한양 송현(松峴)으로 이주하였다. 그에 앞서 1785년(정조 9)경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어 [[김범우(金範禹)]]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은 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전개하였으나 제사 폐지만은 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 사위 [[홍필주(洪弼周)]]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가까운 신자들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사학징의(邪學懲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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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홍익만(洪翼萬)은 경기도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정조 14)을 전후하여 한양 송현(松峴)으로 이주하였다. 그에 앞서 1785년(정조 9)경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어 [[김범우(金範禹)]]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은 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전개하였으나 제사 폐지만은 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 사위 [[홍필주(洪弼周)]]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가까운 신자들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사학징의(邪學懲義)』]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안산과 여주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된 교우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홍익만은 그해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2026_001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안산과 여주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된 교우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홍익만은 그해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2026_001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2018년 1월 9일 (화) 22:53 기준 최신판




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안토니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첨(洪瞻)이고, 할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지낸 홍상빈(洪尙賓)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낸 홍경렴(洪景濂)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서울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홍익만(洪翼萬)은 경기도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정조 14)을 전후하여 한양 송현(松峴)으로 이주하였다. 그에 앞서 1785년(정조 9)경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되어 김범우(金範禹)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은 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전개하였으나 제사 폐지만은 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 사위 홍필주(洪弼周)의 집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가까운 신자들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사학징의(邪學懲義)』]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안산과 여주로 피신을 다니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된 교우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홍익만은 그해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2월 26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