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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이개|한글표제=이개|한자표제=李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세종~세조|집필자=계승범|자=청보(淸甫), 백고(伯高)|호=백옥헌(白玉軒)|봉작=|시호=충간(忠簡)|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417년(태종 17)|사망=1456년(세조 2)|본관=한산(韓山)|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증조부=이색(李穡)|조부=이종선(李種善)|부=이계주(李季疇)|모_외조=삼척 진씨(三陟陳氏) : 진명례(陳明禮)의 딸|형제=|처_장인=이가지(李加知) : 이률(李栗)의 딸|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명황계감(明皇誡鑑)』, 『이선생유고(李先生遺稿)』|작품=「단가(丹歌)」|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1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2309029_005 『세종실록』 23년 9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0027_001 『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0027_001 『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10009_004 『세종실록』 28년 10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10010_002 『세종실록』 28년 10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05015_002 『세종실록』 30년 5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06_001 『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15_001 『문종실록』 즉위년 7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16_003 『문종실록』 즉위년 7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20_005 『문종실록』 즉위년 7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5_004 『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08_002 『단종실록』 1년 11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09_002 『단종실록』 1년 11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1_002 『단종실록』 1년 1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9_001 『단종실록』 1년 11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2001_001 『단종실록』 1년 12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2005_001 『단종실록』 1년 12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7_002 『단종실록』 2년 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9_002 『단종실록』 2년 1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11_001 『단종실록』 2년 1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9002_001 『세조실록』 1년 9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2004_001 『세조실록』 2년 2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2_002 『세조실록』 2년 6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6_001 『세조실록』 2년 6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6_002 『세조실록』 2년 6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7_002 『세조실록』 2년 6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8_002 『세조실록』 2년 6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21_001 『세조실록』 2년 6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9007_004 『세조실록』 2년 9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801025_001 『숙종실록』 18년 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902004_004 『고종실록』 39년 2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001020_002 『고종실록』 40년 1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311013_002 『효종실록』 3년 11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801025_001 『숙종실록』 18년 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2021_002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9007_004 『세조실록』 2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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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417년(태종 17)~1456년(세조 2) = 40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과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계주(李季疇)이고, 어머니 삼척 진씨(三陟陳氏)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이종선(李種善)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이색(李穡)이다. <단종(端宗) 복위 운동> 당시 세상을 떠난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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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태종 17) ~ 1456년(세조 2) = 40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학자이자 사육신 중 한 명. 자는 청보(淸甫) 또는 사고(士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계주(李季疇)이며, 어머니 삼척 진씨(三陟陣氏)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이종선(李種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문신학자인 이색(李穡)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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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종 시대 활동'''==
  
1436년(세종 18) 친시(親試)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했다.[『방목(榜目)』] 1441년(세종 23) 집현전 저작랑(著作郞)으로 당(唐)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일에 대해 기록한 사적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후 세종이 이 책의 이름을 『명황계감(明皇誡鑑)』이라고 지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309029_005 『세종실록』 23년 9월 29일]) 이후 다른 집현전 관료들과 함께 공법을 시행하는 데 있어 해를 9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어려움이 많으니 3등급 또는 5등급으로 나눌 것을 건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0027_001 『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0027_001 『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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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방목(榜目)』], 1441년(세종 23) 집현전 [[저작랑(著作郞)]]으로서 『명황계감(明皇誡鑑)』 편찬에 참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309029_005 『세종실록』 23년 9월 29일])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16_001 『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훈민정음(訓民正音)』 편찬에도 참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9029_004 『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1447년(세종 29)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방목』] 같은 해에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48년(세종 30)에는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세종실록』3 0년 5월 15일 1번째기사]
  
1446년(세종 28)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정창손(鄭昌孫)이 세종에게 불사(佛事) 정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당하게 되자, 이개는 몇몇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대간을 처벌하는 것은 신하로서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이라며 대간의 죄를 용서하길 청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10009_004 『세종실록』 28년 10월 9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10010_002 『세종실록』 28년 10월 10일]) 1448년(세종 30)에는 대구군지사(大丘郡知事)이보흠(李甫欽)이 건의한 사창사의(社倉事宜)의 시행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이개는 사창을 세워 이자를 걷고 난 후 나누어 갚게 하는 사이에 폐해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한 고을에 시험한 것으로 온 나라에 통용할 수는 없다며 사창 시행을 반대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05015_002 『세종실록』 30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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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는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 즉위 직후 시행된 인사에서 [[문학(文學)]]에 제수되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06_001 『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그해 9월에 열린 첫 번째 [[서연(書筵)]]에서 『소학(小學)』을 진강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9017_005 『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1450년(문종 즉위년) 이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06_001 『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이때 문종(文宗)은 세종의 유교에 따라 승려 신미(信眉)에게 호를 내리려 했는데, 집현전 직제학(直提學)박팽년(朴彭年)이 이를 반대한 결과 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이개를 비롯한 9명이 함께 파면당하기를 청했지만 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15_001 『문종실록』 즉위년 7월 15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16_003 『문종실록』 즉위년 7월 16일]) 얼마 후 이개는 세자가 명(明)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 실수를 할까 염려해 백관이 함께 뜰 위에 올라 사신을 접견하도록 요청했고, 문종이 이를 허락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20_005 『문종실록』 즉위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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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시대 활동'''==
  
1453년(단종 1)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5_004 『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같은 해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한 직후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을 개편할 때 가자(加資)되어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다. 이개는 정난에 공이 없다며 가자되는 것을 사양했으나 단종이 윤허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08_002 『단종실록』 1년 11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09_002 『단종실록』 1년 11월 9일]) 한편 계유정난 이후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 등 환관을 비롯한 공신들에게 봉군(封君)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개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권준(權蹲) 등은 환관에게 봉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는데, 이러한 건의는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개는 이는 언관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어둡거나 옳은데도 윤허를 받지 못한 것이며, 결국 둘 다 언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사직하겠다고 요청했으나 단종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1_002 『단종실록』 1년 11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9_001 『단종실록』 1년 11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2001_001 『단종실록』 1년 12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2005_001 『단종실록』 1년 12월 5일]) 그리고 얼마 후 사헌부 장령(掌令)유성원(柳誠源), 사헌부 지평(持平)윤기견(尹起畎) 등과 함께 불당 철거를 청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7_002 『단종실록』 2년 1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9_002 『단종실록』 2년 1월 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11_001 『단종실록』 2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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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명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역대병요(歷代兵要)』가 1453년(단종 1) 완성되었는데 이개도 이 작업에 참여하여 관품이 한 자급 승급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4021_002 『단종실록』1년 4월 21일]) 같은 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 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고, 직후 이개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5_004 『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11월에 정난에 공이 있는 자들에 대한 포상을 시행할 때 이개는 중훈(中訓)으로 승진되었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08_002 『단종실록』 1년 11월 8일]) 자신은 정난에 공이 없다며 가자의 취소를 청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10_002 『단종실록』 1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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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공신책봉 때에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의 공로를 인정하고 공신에 기록하여 봉군(封君)까지 하려는 일이 생기자 이개는 [[사간원(司諫院)]] 좌사간(左司諫)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1_001 『단종실록』 1년 11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8_002 『단종실록』 1년 11월 28일]) 그리고 계속해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1029_001 『단종실록』 1년 11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2001_001 『단종실록』 1년 12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2005_001 『단종실록』 1년 12월 5일]) 이어 이듬해 1월에는 경복궁 내 불당 철거를 지속적으로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7_002 『단종실록』 2년 1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9_002 『단종실록』 2년 1월 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11_001 『단종실록』 2년 1월 11일])
  
 
=='''세조 시대 활동'''==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병조 판서(判書)이계전(李季甸),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정창손(鄭昌孫)등과 함께 관제(官制)를 편찬하는 데 참여했으며,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에 올랐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9002_001 『세조실록』 1년 9월 2일]),([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2004_001 『세조실록』 2년 2월 4일]) 1456년(세조 2)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김질(金礩)과 정창손이 세조에게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성삼문(成三問)이 세조와 상왕인 단종이 함께 명나라 사신을 초청하는 창덕궁에서 단종 복위를 꾸미고 있으며, 이 사실을 이개와 하위지(河緯地) 등도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세조는 바로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을 잡아들이고 직접 국문했다. 처음에 이개는 단종 복위와 관련된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나, 나중에 연루된 사람들이 끌려와 사실을 고하자 자신 또한 연루된 사실을 인정했다. 이후 그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환열(轘裂)당했으며, 세조는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3일간 효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2_002 『세조실록』 2년 6월 2일]),([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6_001 『세조실록』 2년 6월 6일]),([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6_002 『세조실록』 2년 6월 6일]),([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7_002 『세조실록』 2년 6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8_002 『세조실록』 2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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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즉위 이후 이개는 관제(官制) 편찬에 참여하였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9002_001 『세조실록』 1년 9월 2일]) 이듬해 2월에는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2004_001 『세조실록』 2년 2월 4일]) 같은 해 6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이개를 비롯한 성삼문·[[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개는 의금부에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2_002 『세조실록』2년 6월 2일]), 결국 거열형에 처하라는 명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7_002 『세조실록』2년 6월 7일]) 그리고 1456년(세조 2) 6월 8일 이개는 성삼문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으로 사망하였으니,([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8_002 『세조실록』 2년 6월 8일])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의 가족들도 처벌받거나 관노(官奴)로 보내졌는데, 아내 이가지(李加知)는 우참찬(右參贊)강맹경(姜孟卿)에게 보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21_001 『세조실록』 2년 6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9007_004 『세조실록』 2년 9월 7일]) 훗날 남효온(南孝溫)은 그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서 「6신전(六臣傳)」이라는 기록으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兪應孚)를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동자로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1691년(숙종 17)에 정식으로 공인되어 사육신(死六臣) 6명의 신원이 복관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1801025_001 『숙종실록』 18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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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따라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하여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하여 1691년(숙종 17)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리고 1758년(영조 24)에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과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한편 1902년(고종 39) 찬정(贊政)을 지낸 이용직(李容稙)이 이개가 후손이 없으니 그 일가 사람인 이두복(李斗馥)의 둘째 아들 이중원(李重遠)을 봉사손(奉祀孫)으로 세우도록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902004_004 『고종실록』 39년 2월 4일]) 장례원(掌禮院) 경(卿)남정철(南廷哲) 또한 충의를 칭찬하고 장려하여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이 나라의 훌륭한 제도라고 지지했고, 그 결과 고종은 상소문대로 할 것을 허락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001020_002 『고종실록』 40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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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과 일화'''==
  
이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박팽년,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대궐 마당에 붙잡혀서 작형(灼刑)을 받았다. 이때 이개가 천천히 묻기를, “이것이 어찌 형벌이오?” 했다. 아울러 이개는 사람됨이 여위고 약하였음에도 매를 맞을 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아 사람들이 장하다 했다.[『해동잡록(海東雜錄)』3 본조(本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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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할아버지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어 [[국청(鞫廳)]]에 잡혀갔는데, 박팽년과 성삼문을 대궐 뜰에 묶어놓고 작형(灼刑)을 하자 이개는 느긋하게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사람됨이 파리하고 연약했지만 엄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을 변치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사형 당일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시를 짓기를, “우정(禹鼎)이 중할 때에는 사는 것 역시 크지만,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는 죽음 역시 영광이네. 잠 못 이루고 내일 아침 날 밝아 문을 나서는데,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 꿈속에서도 푸르네.”라고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동각잡기(東閣雜記)]
 
 
한편 이개의 숙부는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오른 이계전이다. 세조가 수양대군이었을 당시 이계전이 세조의 집에 친밀히 드나드는 것을 이개가 경계했다. 단종 복위 사건 이후 세조가 이개에게 형을 가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이개가 제 숙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못된 놈이라 여겼더니 과연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로구나!”라고 했다.[『동각잡기(東閣雜記)』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55-1번지 사육신 공원 안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1652년(효종 3) 전 판서조경(趙絅)의 건의로 이개를 포함한 사육신의 정려를 세웠고, 이어 1679년(숙종 5) 사육신의 묘소 앞에 있던 사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민절사(愍節祠)’로 이름 붙였다가, ‘민절서원(愍節書院)’이라 고쳐 액호를 내려 보냈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0311013_002 『효종실록』 3년 11월 13일]),([http://sillok.history.go.kr/id/ksa_11801025_001 『숙종실록』 18년 1월 25일])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의 정단에 배향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2021_002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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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사육신묘 내에 위치해있다. 이개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속(李栗)의 딸이다. 이개가 거열형으로 사망한 재산은 몰수당하였고, 남은 가족들은 연좌형에 따라 처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7_002 『세조실록』 2년 6월 7일])
 
 
부인 이가지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률(李栗)의 딸이다. 이개가 거열형에 처해진 우참찬강맹경에게 노비로 보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9007_004 『세조실록』 2년 9월 7일]) 슬하의 자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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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端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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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숙종실록(肅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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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國朝寶鑑)』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동각잡기(東閣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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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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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東國正韻)』       
*『추강집(秋江集)』     
 
*『해동잡록(海東雜錄)』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세조]]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세조]]

2018년 1월 10일 (수) 00:22 기준 최신판




총론

[1417년(태종 17) ~ 1456년(세조 2) = 40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학자이자 사육신 중 한 명. 자는 청보(淸甫) 또는 사고(士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계주(李季疇)이며, 어머니 삼척 진씨(三陟陣氏)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이종선(李種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문신학자인 이색(李穡)이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방목(榜目)』], 1441년(세종 23) 집현전 저작랑(著作郞)으로서 『명황계감(明皇誡鑑)』 편찬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3년 9월 29일)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훈민정음(訓民正音)』 편찬에도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1447년(세종 29)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방목』] 같은 해에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48년(세종 30)에는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세종실록』3 0년 5월 15일 1번째기사]

이개는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 즉위 직후 시행된 인사에서 문학(文學)에 제수되었으며,(『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그해 9월에 열린 첫 번째 서연(書筵)에서 『소학(小學)』을 진강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단종 시대 활동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역대병요(歷代兵要)』가 1453년(단종 1) 완성되었는데 이개도 이 작업에 참여하여 관품이 한 자급 승급되었다.(『단종실록』1년 4월 21일) 같은 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 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고, 직후 이개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15일) 11월에 정난에 공이 있는 자들에 대한 포상을 시행할 때 이개는 중훈(中訓)으로 승진되었으나,(『단종실록』 1년 11월 8일) 자신은 정난에 공이 없다며 가자의 취소를 청하기도 하였다.(『단종실록』 1년 11월 10일)

한편 이 공신책봉 때에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의 공로를 인정하고 공신에 기록하여 봉군(封君)까지 하려는 일이 생기자 이개는 사간원(司諫院) 좌사간(左司諫)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단종실록』 1년 11월 21일),(『단종실록』 1년 11월 28일) 그리고 계속해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다.(『단종실록』 1년 11월 29일),(『단종실록』 1년 12월 1일),(『단종실록』 1년 12월 5일) 이어 이듬해 1월에는 경복궁 내 불당 철거를 지속적으로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7일),(『단종실록』 2년 1월 9일),(『단종실록』 2년 1월 11일)

세조 시대 활동

세조 즉위 이후 이개는 관제(官制) 편찬에 참여하였으며,(『세조실록』 1년 9월 2일) 이듬해 2월에는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세조실록』 2년 2월 4일) 같은 해 6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이개를 비롯한 성삼문·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개는 의금부에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고,(『세조실록』2년 6월 2일), 결국 거열형에 처하라는 명을 받았다(『세조실록』2년 6월 7일) 그리고 1456년(세조 2) 6월 8일 이개는 성삼문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으로 사망하였으니,(『세조실록』 2년 6월 8일)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따라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하여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하여 1691년(숙종 17)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리고 1758년(영조 24)에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과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성품과 일화

이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할아버지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어 국청(鞫廳)에 잡혀갔는데, 박팽년과 성삼문을 대궐 뜰에 묶어놓고 작형(灼刑)을 하자 이개는 느긋하게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사람됨이 파리하고 연약했지만 엄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을 변치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사형 당일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시를 짓기를, “우정(禹鼎)이 중할 때에는 사는 것 역시 크지만,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는 죽음 역시 영광이네. 잠 못 이루고 내일 아침 날 밝아 문을 나서는데,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 꿈속에서도 푸르네.”라고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동각잡기(東閣雜記)』]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사육신묘 내에 위치해있다. 이개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속(李栗)의 딸이다. 이개가 거열형으로 사망한 후 재산은 몰수당하였고, 남은 가족들은 연좌형에 따라 처결되었다.(『세조실록』 2년 6월 7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훈민정음(訓民正音)』
  • 『동국정운(東國正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