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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해문역|한글표제=해문역|한자표제=海門驛|대역어=|상위어=금정도(金井道)|하위어=|동의어=|관련어=속역(屬驛), 역노(驛奴), 역비(驛婢), 홍성군(洪城郡), 결성현(結城縣)|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朝鮮)|왕대=|집필자=이승민|설치시기=1415년(태종 15)|폐지시기=1896년(건양 1) 1월|소속관서=병조(兵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84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8005_004 『세조실록』 8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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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해문역|한글표제=해문역|한자표제=海門驛|대역어=|상위어=양재도(良才道), 영화도(迎華道)|하위어=|동의어=|관련어=속역(屬驛), 동화도(同化道同化道), 찰방(察訪), 역노(驛奴), 역비(驛婢),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朝鮮)|왕대=|집필자=이승민|설치시기=15세기경|폐지시기=1896년(건양 1) 1월|소속관서=병조(兵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49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2005_004 『세조실록』 6년 2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8029_002 『정조실록』 20년 8월 29일]}}
  
조선시대 충청도의 도로망인 금정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에 위치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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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의 도로망인 양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개설'''==
  
해문역(海門驛)은 조선초기 태종대에 지방 행정 구역인 5도양계(五道兩界)를 8도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신설되었다. 그 뒤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재편할 때 금정도(金井道)에 소속되었고, 세조 연간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금정도의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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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면서 경기도에 동화도(同化道)를 설치하고 [[역승(驛丞)]]을 파견했는데, 해문역(海門驛)은 이때 동화도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세조 연간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역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양재도(良才道)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대에는 양재도가 [[영화도(迎華道)]]로 바뀜에 따라 영화도 소속이 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대동지지(大東地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따르면, 태종 때 5도양계를 8도 체제로 개편하면서 1415년(태종 15)에 신설하였다. 세종대에는 전국의 역로망을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정비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그 과정에서 광시역(光時驛)·[[세천역(世川驛)]]·용곡역(龍谷驛) 등과 함께 충청도의 역도인 금정도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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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에 전국의 역로망을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동화역(同化驛)]]·장족역(長足驛)·[[청호역(菁好驛)]]·[[가천역(加川驛)]]·[[강복역(康福驛)]]과 함께 동화도역승이 관할하는 역이 되었다. 해문역은 남쪽으로 충청도 지역의 [[성환도(成歡道)]]와 곧바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결성현 편에 따르면, 해문역에는 역마 10필과 역노 5명, 역비 4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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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기도 남양 편에 따르면, 해문역에는 대마(大馬) 1필, 기마(騎馬) 1필, 복마(卜馬) 3필 등 총 5필의 역마와, 역노(驛奴) 11명, 역비(驛婢) 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변천'''==
  
1462년(세조 8)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역로가 쇠퇴해 여러 폐단이 있다는 병조의 지적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驛丞)]]을 두도록 하였다. 그에 따라 해문역은 광시역·용곡역·세천역 등과 함께 금정도 관할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8005_004 『세조실록』 8년 8월 5일]). 해문역은 그 뒤 조선후기까지 금정도에 소속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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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을 정비하였다. 1457년(세조 3) 7월에 여러 도와 역에 역승을 없애고 [[찰방(察訪)]]이 여러 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했는데, 역로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종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경기도에서는 해문역이 소속되어 있던 동화도를 비롯해 양재도·[[중림도(重林道)]]에 속한 23개 역을 통합해 경기좌도(京畿左道)라고 하고, 경기좌도찰방이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2005_004 『세조실록』 6년 2월 5일]).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전국의 역로를 41역도-543속역으로 개편하였고, 이 체제가 대부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계승되면서 해문역은 장족역(長足驛)·[[동화역(同化驛)]] 등과 함께 양재도에 속한 12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확립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양재도의 본역이 수원(水原)으로 이설(移設)되고 [[영화도(迎華道)]]로 개칭되면서 영화도찰방 체제로 재편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8029_002 『정조실록』 20년 8월 29일]). 이는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문역은 그 뒤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해문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에 따르면 결성현 북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와 『광여도(廣輿圖)』를 통해서도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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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은 조선초기 역의 설치 기준에 따라 역을 이설(移設)하고 역도를 재편할 것을 주장하면서, 당시 양재도의 속역이던 해문역과 동화역을 중림도로 이속하고 중림도에 인덕역(仁德驛)을 새로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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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문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남양도호부 관아에서 2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남양도호부 관아 동쪽 1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남양도호부 관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위치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일대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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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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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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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대동지지(大東地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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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1872년 지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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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광여도(廣輿圖)』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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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9 판



조선시대 경기도의 도로망인 양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전기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면서 경기도에 동화도(同化道)를 설치하고 역승(驛丞)을 파견했는데, 해문역(海門驛)은 이때 동화도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세조 연간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역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양재도(良才道)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대에는 양재도가 영화도(迎華道)로 바뀜에 따라 영화도 소속이 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망을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동화역(同化驛)·장족역(長足驛)·청호역(菁好驛)·가천역(加川驛)·강복역(康福驛)과 함께 동화도역승이 관할하는 역이 되었다. 해문역은 남쪽으로 충청도 지역의 성환도(成歡道)와 곧바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기도 남양 편에 따르면, 해문역에는 대마(大馬) 1필, 기마(騎馬) 1필, 복마(卜馬) 3필 등 총 5필의 역마와, 역노(驛奴) 11명, 역비(驛婢) 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을 정비하였다. 1457년(세조 3) 7월에 여러 도와 역에 역승을 없애고 찰방(察訪)이 여러 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했는데, 역로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종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경기도에서는 해문역이 소속되어 있던 동화도를 비롯해 양재도·중림도(重林道)에 속한 23개 역을 통합해 경기좌도(京畿左道)라고 하고, 경기좌도찰방이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전국의 역로를 41역도-543속역으로 개편하였고, 이 체제가 대부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계승되면서 해문역은 장족역(長足驛)·동화역(同化驛) 등과 함께 양재도에 속한 12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확립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양재도의 본역이 수원(水原)으로 이설(移設)되고 영화도(迎華道)로 개칭되면서 영화도찰방 체제로 재편되었다(『정조실록』 20년 8월 29일). 이는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문역은 그 뒤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은 조선초기 역의 설치 기준에 따라 역을 이설(移設)하고 역도를 재편할 것을 주장하면서, 당시 양재도의 속역이던 해문역과 동화역을 중림도로 이속하고 중림도에 인덕역(仁德驛)을 새로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해문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남양도호부 관아에서 2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남양도호부 관아 동쪽 1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남양도호부 관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위치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일대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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