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역(新安驛)"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집단기구|대표표제=신안역|한글표제=신안역|한자표제=新安驛|대역어=|상위어=대동도(大同道)|하위어=|동의어=신안관(新安館)|관련어=정주목(定州牧), 역관(驛館), 흥화도(興化道), 역도(驛道), 역로(驛路),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정주|시대=조선|왕대=|집필자=정요근|설치시기=고려|폐지시기=1896년(고종 33) 1월|소속관서=병조|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06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100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
{{집단기구|대표표제=신안역|한글표제=신안역|한자표제=新安驛|대역어=|상위어=은계도(銀溪道)|하위어=|동의어=|관련어=속역(屬驛), 동안역(東安驛), 신양역(新揚驛),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분야=경제/교통/육운|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朝鮮)|왕대=|집필자=이승민|설치시기=15세기경|폐지시기=1896년(건양 1) 1월|소속관서=병조(兵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37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5_003 『세종실록』 6년 3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8005_004 『세조실록』 8년 8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11001_003 『성종실록』 4년 11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6018_004 『성종실록』 7년 6월 18일]}}
  
조선시대 평안도 정주에 위치했던 역.
+
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은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 북한 지역인 강원도 회양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신안역(新安驛)은 정주목의 읍치에 위치한 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에서 평안도에 위치한 역들을 ‘관()’이라고도 호칭했던 까닭에, 사료상에는 신안관(新安館)으로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
신안역(新安驛)은 조선 세종 때 역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강원도 회양부의 신양역(新揚驛)과 [[동안역(東安驛)]]이 합쳐져 생겨났다.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면서 [[은계도(銀溪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치하였다.
  
신안역은 고려시대에는 흥화도(興化道) 소속으로 곽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신안역을 포함하여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곳들은 모두 대동도(大同道)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
=='''설립 경위 및 목적'''==
  
=='''내용 및 변천'''==
+
조선 세종 연간인 1424년(세종 6)에는 고려시대의 역제(驛制)를 개편하여 역로를 새롭게 재정비했는데, 신안역은 그 과정에서 회양부에 있던 신양역과 동안역이 합쳐져 생겨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5_003 『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신안역은 [[생창역(生昌驛)]]과 함께 함길도의 국경 상황을 중앙에 치보(馳報)하는 대로(大路)에 위치해 있었다.
  
신안역은 조선시대 평안도 정주에 위치했던 유일한 역이다. 고려시대에는 흥화도(興化道) 소속으로 곽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후기 이후 몇 차례의 군현 개편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신안역이 정주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신안역은 고려시대의 신안역으로부터 위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 들어와 평안도 지역의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13곳의 역관(驛館)들은 모두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의 관할하에 있었다. 신안역 역시 평안도관로찰방 관할하의 13곳 역관(驛館) 중 하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100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관로찰방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회양 편에 따르면, 신안역에는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2필, 복마(卜馬) 9필 등 총 13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14명, 역노(驛奴) 130명, 역비(驛婢) 16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후 신안역은 조선말까지 대동도 소속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1462년(세조 8) 전국적인 역도제(驛道制)의 개편 때에도 평안도 지역은 역도 편성에 변화가 없었으며, 이후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모두 신안역은 대동도의 소속 역으로 기록되었다.
+
=='''변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신안역에는 역노(驛奴) 73명, 역비(驛婢) 56명, 역마(驛馬) 16마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
조선 세종 연간에 전국의 역로를 개편할 당시 강원도에는 [[보안도(保安道)]]·대창도(大昌道)·[[평릉도(平陵道)]] 등 3개의 역도가 있었다. 하지만 신안역은 [[은계역(銀溪驛)]] 등 18개 역과 더불어 기존의 역도에 속하지 않는 역이었다. 세조대에 들어와서는 대창도가 [[상운도(祥雲道)]]로 변경되고 [[은계도(銀溪道)]]가 신설되면서, 강원도의 역로는 은계도·보안도·상운도·평릉도의 4개 역도 체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안역은 은계도찰방에 속하는 17개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8005_004 『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후 조선후기까지 은계도에 소속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안역은 서쪽으로는 곽산·선천 방면, 동쪽으로는 가산·안주 방면을 연결하는 평양~의주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신안역에서는 서쪽으로 곽산 운흥역(雲興驛), 동쪽으로 가산 가평역(嘉平驛)과 연결되었다.
+
한편 성종대인 1473년(성종 4)에는 신안역과 은계역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의 6개 역이 쇠퇴하여 피폐하다는, 은계도 역리의 장고(狀告)에 의거하여, 이 지역 역에서 근무하는 [[군관(軍官)]]의 양료(養料) 즉 식량을 군자미두(軍資米豆)로 공급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11001_003 『성종실록』 4년 11월 1일]). 또 1476년(성종 7)에는 신안역과 회양역의 조폐(凋弊)가 심해지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강원도 및 다른 도에서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사람을 역의 향리로 삼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6018_004 『성종실록』 7년 6월 18일]).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신안역도 폐지되었다.
+
신안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회양도호부 동남쪽 3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회양도호부 남쪽 3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신안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평안북도 정주시 성남동에 해당한다. 한편 고려시대의 신안역은 조선시대 신안역보다 동쪽에 위치한 현 정주시 신안리 지역으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대전회통(大典會通)』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관계망'''==
 
=='''관계망'''==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6061"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237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분류:경제]][[분류:교통]][[분류:육운]][[분류:집단·기구]][[분류:정주]][[분류:조선]]
+
[[분류:경제]][[분류:교통]][[분류:육운]][[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朝鮮)]]

2017년 12월 10일 (일) 01:56 판



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은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 북한 지역인 강원도 회양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신안역(新安驛)은 조선 세종 때 역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강원도 회양부의 신양역(新揚驛)과 동안역(東安驛)이 합쳐져 생겨났다.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면서 은계도(銀溪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세종 연간인 1424년(세종 6)에는 고려시대의 역제(驛制)를 개편하여 역로를 새롭게 재정비했는데, 신안역은 그 과정에서 회양부에 있던 신양역과 동안역이 합쳐져 생겨났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신안역은 생창역(生昌驛)과 함께 함길도의 국경 상황을 중앙에 치보(馳報)하는 대로(大路)에 위치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회양 편에 따르면, 신안역에는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2필, 복마(卜馬) 9필 등 총 13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14명, 역노(驛奴) 130명, 역비(驛婢) 16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조선 세종 연간에 전국의 역로를 개편할 당시 강원도에는 보안도(保安道)·대창도(大昌道)·평릉도(平陵道) 등 3개의 역도가 있었다. 하지만 신안역은 은계역(銀溪驛) 등 18개 역과 더불어 기존의 역도에 속하지 않는 역이었다. 세조대에 들어와서는 대창도가 상운도(祥雲道)로 변경되고 은계도(銀溪道)가 신설되면서, 강원도의 역로는 은계도·보안도·상운도·평릉도의 4개 역도 체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안역은 은계도찰방에 속하는 17개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후 조선후기까지 은계도에 소속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성종대인 1473년(성종 4)에는 신안역과 은계역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의 6개 역이 쇠퇴하여 피폐하다는, 은계도 역리의 장고(狀告)에 의거하여, 이 지역 역에서 근무하는 군관(軍官)의 양료(養料) 즉 식량을 군자미두(軍資米豆)로 공급하게 하였다(『성종실록』 4년 11월 1일). 또 1476년(성종 7)에는 신안역과 회양역의 조폐(凋弊)가 심해지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강원도 및 다른 도에서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사람을 역의 향리로 삼도록 하였다(『성종실록』 7년 6월 18일).

신안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회양도호부 동남쪽 3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회양도호부 남쪽 3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