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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숙의윤씨|한글표제=숙의윤씨|한자표제=淑儀尹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선조|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숙의(淑儀)|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사망=1623년(인조 1) 3월 13일|본관=파평(坡平)|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증조부=윤선철(尹先哲)|조부=윤경(尹暻)|부=윤홍업(尹弘業)|모_외조=창원 유씨(昌原兪氏) : 유필영(兪必英)의 딸|형제=|처_장인=(남편)광해군(光海君) →(자녀)1녀|자녀=(1녀)박징원(朴澂遠)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0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8008_001 『광해군일기』 9년 8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8018_001 『광해군일기』 9년 8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07008_006 『광해군일기』 10년 7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104008_007 『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4_003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14_001 『인조실록』 1년 9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3026_001 『인조실록』 2년 3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909017_003 『인조실록』 19년 9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104018_001 『인조실록』 21년 4월 18일]}}
 
 
 
=='''총론'''==
 
 
 
[?~1623년(인조 1) = ?].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후궁.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능성현령(綾城縣令)을 지낸 윤홍업(尹弘業)이며, 어머니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유필영(兪必英)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찬判에) 추증된 윤경(尹暻)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윤선철(尹先哲)이다.
 
 
 
=='''광해군의 후궁'''==
 
 
 
윤숙의(尹淑儀)는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숙의(淑儀)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8008_001 『광해군일기』 9년 8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8018_001 『광해군일기』 9년 8월 18일]) 이듬해인 1618년(광해군 10) 소의(昭儀)로 품계가 올랐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07008_006 『광해군일기』 10년 7월 8일]) 1619년(광해군 11) 산실(産室)을 설치하라는 기사로 보아 이 때 딸을 출산한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104008_007 『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
 
 
 
1623년(인조 1) 3월 13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그리고 윤숙의는 음행(淫行)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음 날 군문(軍門) 밖에서 사형에 처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4_003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14_001 『인조실록』 1년 9월 14일])
 
 
 
=='''묘소와 후손'''==
 
 
 
윤숙의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광해군과 자신의 딸 무덤이 있는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묘와 묘비석이 상당히 훼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으나 옹주 묘가 근처에 있고 사위인 음성 박씨(陰城朴氏) 집안에서 제사를 이곳에서 따로 지냈다는 증언이 있다.(http://blog.naver.com/green_kiki/140156968805)
 
 
 
윤숙의는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1녀가 있다. 광해군의 유일한 외동딸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아버지 광해군은 유배를 가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던 때 그녀의 나이 5세였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고 폐서인이 되어 옹주 책봉을 받지 못한 채 외삼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인조(仁祖)는 그녀에게 장성할 때까지 요미(料米)를 주라고 명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3026_001 『인조실록』 2년 3월 26일]) 1641년(인조 19) 7월 광해군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딸에게 쌀 10석과 콩 5석 및 각종 찬물(饌物)을 주어 제사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909017_003 『인조실록』 19년 9월 17일]) 또한 광해군의 본궁(本宮)에 살게 하며 전택(田宅)과 노비 및 기타 먹을 것을 넉넉히 주어 광해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9년 8월 25일],[『승정원일기』인조 19년 9월 1일],[『승정원일기』인조 19년 9월 15일] 그리고 광해군의 상(喪)이 끝나자 혼례를 할 수 있도록 혼수를 지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104018_001 『인조실록』 21년 4월 18일]),[『승정원일기』인조 21년 4월 19일] 광해군의 딸은 박징원(朴徵遠)과 혼인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     
 
 
 
[[분류:왕족]][[분류:후궁]][[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성종~선조]]
 

2018년 1월 24일 (수) 22:20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