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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경 자암(紫岩)으로 이주하여 아현에 거주하는 황 베드로와 김 말두음에게 교리를 배웠다. 또 [[홍봉주(洪鳳周)]]와도 왕래를 했으며 김 말두음으로부터 베르뇌(Berneux) 주교를 소개받았고, 1864년(고종 1)경에는 베르뇌 주교의 집에서 다블뤼(Daveluy) 주교를 소개받기도 하였다. 정의배는 1865년(고종 2) 5월에 입국한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신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으며, 볼리외(Beaulieu) 신부, 위앵(Huin) 신부, 도리(Dorie) 신부도 그의 집을 왕래하였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이처럼 정의배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자신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주위의 많은 교우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하였다. | 1860년경 자암(紫岩)으로 이주하여 아현에 거주하는 황 베드로와 김 말두음에게 교리를 배웠다. 또 [[홍봉주(洪鳳周)]]와도 왕래를 했으며 김 말두음으로부터 베르뇌(Berneux) 주교를 소개받았고, 1864년(고종 1)경에는 베르뇌 주교의 집에서 다블뤼(Daveluy) 주교를 소개받기도 하였다. 정의배는 1865년(고종 2) 5월에 입국한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신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으며, 볼리외(Beaulieu) 신부, 위앵(Huin) 신부, 도리(Dorie) 신부도 그의 집을 왕래하였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이처럼 정의배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자신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주위의 많은 교우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하였다. | ||
− | 1866년(고종 3)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자 정의배는 2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던 주교의 하인 이선이( | + | 1866년(고종 3)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자 정의배는 2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던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1월 11일 집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후 의금부로 옮겨져 재차 심문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1016_003 『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1월 16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1월 16일] 당시 그는 동료 교우들을 대라는 요구에 이미 죽은 신자들의 이름만 진술하여 다른 교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였다. 의금부에서는 1월 20일 서양인 신부들에 대해서 사형선고를 내리고 정의배에 대해서는 심문 과정에서 미진한 점이 있다며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1020_002 『고종실록』 3년 1월 20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0일] 정의배는 재차 심문을 받으면서도 절대 배교 할 수 없다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결국 정의배는 그해 1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1월 25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301025_001 『고종실록』 3년 1월 25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4일] 그의 시신은 처형된 지 며칠 후 그의 아내가 돈을 주고 거두어 갔다. |
1968년 10월 6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 1968년 10월 6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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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의배 |
한글표제 | 정의배 |
한자표제 | 丁義培 |
분야 | 천주교도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고종 |
집필자 | 홍연주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795년(정조 19) |
사망 | 1866년(고종 3) 1월 25일 |
주거지 | 서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의배(丁義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1월 16일, 『고종실록』 3년 1월 20일, 『고종실록』 3년 1월 25일 |
총론
[1795년(정조 19)~1866년(고종 3) = 72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고종(高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마르코. 거주지는 서울이다.
순조~고종 시대 활동
서울 창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의배(丁義培)는 서당을 운영하며 유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유학자로서 조상 제사를 반대하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스스로 천주교 관련 서적을 구하여 공부를 하고 입교하였다. 또한 1845년(헌종 11) 페레올(Ferreol) 주교가 입국하자 신자들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1854년(철종 5) 고아구호단체인 성영회(聖嬰會)가 조직되자 이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기도 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1860년경 자암(紫岩)으로 이주하여 아현에 거주하는 황 베드로와 김 말두음에게 교리를 배웠다. 또 홍봉주(洪鳳周)와도 왕래를 했으며 김 말두음으로부터 베르뇌(Berneux) 주교를 소개받았고, 1864년(고종 1)경에는 베르뇌 주교의 집에서 다블뤼(Daveluy) 주교를 소개받기도 하였다. 정의배는 1865년(고종 2) 5월에 입국한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신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으며, 볼리외(Beaulieu) 신부, 위앵(Huin) 신부, 도리(Dorie) 신부도 그의 집을 왕래하였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이처럼 정의배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자신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주위의 많은 교우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자 정의배는 2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던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1월 11일 집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후 의금부로 옮겨져 재차 심문을 받았다.(『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1월 16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1월 16일] 당시 그는 동료 교우들을 대라는 요구에 이미 죽은 신자들의 이름만 진술하여 다른 교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였다. 의금부에서는 1월 20일 서양인 신부들에 대해서 사형선고를 내리고 정의배에 대해서는 심문 과정에서 미진한 점이 있다며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하여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고종실록』 3년 1월 20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0일] 정의배는 재차 심문을 받으면서도 절대 배교 할 수 없다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결국 정의배는 그해 1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1월 25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다.(『고종실록』 3년 1월 25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1월 24일] 그의 시신은 처형된 지 며칠 후 그의 아내가 돈을 주고 거두어 갔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품과 일화
정의배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해박해 후 천주교 서적들을 찾아 본 뒤 “천주교인은 좋은 사람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려면 천주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며 천주교 신앙을 갖기 시작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정의배에 대해 “저 노인을 보시오. 저 분의 날들은 완전하고 저 분의 길은 바릅니다. 나는 천국에서 저 분의 자리만큼 훌륭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항성 변함없이 입술에는 미소를 띠고 주야를 막론하며 그를 부르는 사람들을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성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 『치명일기(致命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