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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613년(광해군5)~1677년(숙종3) = 65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 활동한 유일(遺逸). 자(字)는 자첨(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합천(陜川) 경촌(瓊村)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배양(裵敭)이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주부(主簿)]]김수(金洙)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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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광해군5)~1677년(숙종3) = 65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 활동한 유일(遺逸). 자(字)는 자첨(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합천(陜川) 경촌(瓊村)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배양(裵敭)이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주부(主簿)]]김수(金洙)의 딸이다.
  
 
=='''인조~숙종 시대 경상도 유일'''==
 
=='''인조~숙종 시대 경상도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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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가야동(伽倻洞)의 언덕에 있는데, 아들의 친구 이당규(李堂揆)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무과(武科)]]유경문(柳慶文)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는 통덕랑이찬(李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배석윤(裵碩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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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가야동(伽倻洞)의 언덕에 있는데, 아들의 친구 이당규(李堂揆)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무과(武科)]]유경문(柳慶文)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는 통덕랑이찬(李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배석윤(裵碩胤)이다.
  
 
=='''관력, 행적'''==
 
=='''관력, 행적'''==

2018년 1월 9일 (화) 22:44 기준 최신판




총론

[1613년(광해군5)~1677년(숙종3) = 65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 활동한 유일(遺逸). 자(字)는 자첨(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합천(陜川) 경촌(瓊村)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배양(裵敭)이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주부(主簿)김수(金洙)의 딸이다.

인조~숙종 시대 경상도 유일

어려서부터 유달리 지혜로웠는데, 겨우 손가락으로 하나 둘을 셀 시기에 글자를 쓰고 글자를 차례대로 엮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애훼(哀毁)함이 어른과 같았고 상중(喪中)에 예문(禮文)을 읽고 예문에 따라 행동하였다. 자라면서 경학(經學) 공부에만 독실한 뜻을 두어 순실한 선비가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의 가르침대로 일상생활을 하였는데, 행동에 있어서 몸가짐을 아주 삼가고 언행을 지극히 조심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에는 과거를 보지 않았는데, “나는 본디 재덕(才德)도 없고, 또 양친도 다 안 계시니, 벼슬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척화파(斥和派)의 절의(節義)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경상도에서 도내의 인재 중에서 등용할 만한 자를 추천하였는데, 합천(陜川)의 선비 배일장과 덕천서원(德川書院)의 박만(朴曼)을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였다. 조정에서 재랑(齋郞: 참봉)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만년에 태화역창(胎火疫瘡)이라는 병을 앓았는데, 병이 심하여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으나, 그는 오히려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경서를 낭랑하게 읽는 것이 평일과 다름없었다. 옷이 낡아도 갈아입지 않고 “아직도 몸을 가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옷을 짓는단 말이냐?”고 하였다. 자손들을 훈계하기를, “어른을 공경하고 게으르지 말고, 남들과 다투지 말며, 특히 남의 허물은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1677년(숙종3) 3월에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65세였다. 그 다음달 4월에 좌의정권대운(權大運)이 빈청(賓廳)에서 전국의 유일을 천거하는 단자(單子)를 숙종에게 바쳤는데, 그 단자의 9명 중에서 배일장이 제일 첫 번째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품과 일화

배일장은 용모가 단아하고 기상이 화락(和樂)하였으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을 뿐 아니라, 성실하게 인륜(人倫)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어렸을 때에 아이들이 상대편의 부모를 가지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보고, “자식이 아무리 잘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부모가 시켜서 그러겠는가. 더구나 내가 남의 부모를 욕하면, 남도 내 부모를 욕하게 되는 법이니, 제가 제 부모를 욕하는 짓은 제발 하지 말자.”하고, 아이들을 타일러서 부모를 욕하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아주 기특하게 여겼다.

그가 어머니를 봉양할 때, 어머니가 식사하는 양이 전보다 줄어들면 걱정하는 얼굴빛이 완연히 드러났다. 밖으로 나갈 때면 반드시 돌아올 시간을 미리 말씀드렸는데 한 번도 이를 어긴 일이 없었다. 평소에도 날마다 사당(祠堂)에 참배하였는데, 기제사(忌祭祀)가 있는 달에는 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제사 전 10일 이내에는 문 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 전부터는 죽만 먹고 슬픈 얼굴을 하면서, 재계하는 옷을 입고 단정히 앉아 밤을 지새웠다.

아버지의 묘소가 지형(地形)이 가파른 곳에 있었는데, 항상 걱정하여 장마가 지면 몸소 묘소를 지켰다. 밤중에 소나기가 오기라도 하면, 반드시 자제들에게 가서 지키게 하였는데, 그는 자제들이 돌아와서 보고할 때까지 안절부절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렸다. 30년을 하루 같이 이처럼 묘소를 지키다가, 마침내 좋은 자리를 잡아서 이장을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옛날 묘소 자리가 수해를 입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가야동(伽倻洞)의 언덕에 있는데, 아들의 친구 이당규(李堂揆)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무과(武科)유경문(柳慶文)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는 통덕랑이찬(李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배석윤(裵碩胤)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약천집(藥泉集)』
  • 『경재집(敬齋集)』
  • 『한사집(寒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