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인문(熙仁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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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의 합문(閤門).

개설

창덕궁의 편전은 선정전과 희정당이다. 희정당은 초기에는 야대청으로 쓰였으나 선정전이 빈전 또는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온전히 편전으로만 쓰였다. 희인문(熙仁門)은 희정당의 합문으로 왕이 공적인 정사를 볼 때 상징적 한계선으로서의 예를 갖추는 공간이었다.

위치 및 용도

희인문은 희정당의 남행각에 있는 정문이었다. 같은 남행각에 있으며 희인문과 나란한 동쪽의 문은 규정문이었고, 규정문의 북쪽에 있는 희정당을 둘러싼 동쪽 담장의 문은 동인문, 희정당 북쪽 담장의 문은 장순문이었다. 희정당 서쪽 담장에는 2개의 문이 있었는데 선례문과 오목문이었다. 궁궐의 남쪽 마당에서 대내로 들어가 희인문까지 가는 데는 하나의 축을 이루는 공간이 있었다. 가장 남쪽이며 바깥인 협양문이 있었고, 길고 좁은 마당을 지나가면 선화문, 선화문을 통과해 다시 작은 마당을 거쳐 안쪽으로 들어가면 희인문이 나온다. 이 축은 의례의 동선을 만드는 공간이 되었다.

희인문은 편전의 합문이었기 때문에 왕과 신하가 만나게 되는 정치적인 여러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영조가 정순왕후를 맞이하던 가례 때에 친영하여 대내로 들어가는 상징적 문을 희인문으로 삼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희인문은 창덕궁이 창건되던 태종 연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희정당의 당호가 숭문당, 수문당에서 다시 희정당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액호가 희인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17년에 일어난 대조전의 화재로 희정당 영역이 함께 소실되었는데, 그것을 빌미로 1920년 12월에 경복궁의 강령전을 이건해 희정당을 복원하면서 일대 전각들의 배치가 크게 변화되었다. 희인문은 이때 사라졌다.

형태

희인문은 희정당의 남쪽 행각에 있던 평문으로 ‘동궐도’에서는 문짝이 보이지 않게 감색의 휘장을 달아놓았다. 1칸 규모의 문으로 보이는데 ‘동궐도형’에서는 2칸 문으로 표현되었다. 희인문의 동쪽에 좌우대칭으로 서 있는 문이 규정문인데, 이 문 역시 동궐도형을 살펴보면 황화문과 함께 각각 1칸씩 2칸의 문으로 기록되었다. 동궐도에서 희인문과 규정문이 똑같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각 1칸씩 2칸의 문이 연이어 놓였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17년(숙종 43) 7월에 왕이 좌의정이이명을 지목하여 독대를 명하였다. 이른바 정유 독대다. 당시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훗날의 경종을 세자에서 끌어내리려는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왕과 대신이 독대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올바른 규범이 아니라는 것이 신하들의 생각이었다. 승지남도규를 비롯한 기사관권적 등이 희정당 마당을 가로질러 희인문 밖으로 물러나다가, 권적 등이 갑자기 되돌아서서 고사를 인용하여 한나라의 신하가 궁중의 작은 문을 밀어젖히고 바로 들어갔던 것처럼 왕의 허락이 없었지만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정을 들은 왕이 입시를 허락하여 차례대로 희인문으로 들어가 마당에 엎드렸지만 논쟁은 계속되었고 왕이 세자에 관한 일을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숙종실록』 43년 7월 19일)(『숙종실록』 43년 7월 2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誌)』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