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령군 이타(熙寧君 李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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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5년(세조 11) = 미상].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6왕자. 봉작(封爵)은 희령군(熙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최숙의(崔淑儀)이다. 최숙의가 낳은 2남 중에서 맏아들인데, 후령군(厚寧君)이간(李*)의 동복형이다. 첫째부인 순창 신씨(淳昌申氏)는 첨지(僉知)신숙생(申淑生)의 딸이다. 둘째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군수(郡守)신사렴(申士廉)의 딸인데, 아들 셋을 두었다.

전원 생활

이타(李*)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고, 벼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 근교 남쪽인 율현리(栗峴里)에 거처하면서 책 읽기, 거문고 연주, 화초 기르기를 낙으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 1월 희령군에 봉해졌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직후에 윤처공(尹處恭)의 집을 하사 받았다. 윤처공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과 함께 단종을 보호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종친들은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었는데, 희령군이타가 윤처공을 집을 받은 것을 보면, 수양대군의 정변에 적극 가담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465년(세조 11) 7월 7일에 돌아갔는데, 그의 졸기(卒記)를 보면, 그는 질병으로 인하여 조정에 하루도 설 수가 없었다고 하였고, 그의 성품에 관해서는 온순하고 부드러웠다고 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1년 7월 7일)

『전주 이씨 대관(全州李氏大觀)』에 의하면, 이타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집하는 데 힘을 보태었다고 하나, 찬집자(撰輯者)의 명단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는 음율에 능통해서 거문고를 잘 탔는데, 『용비어천가』를 찬집할 당시에 노래의 곡을 만드는 데 기여하자, 세종은 그를 조정의 악장(樂長)으로 삼았다. 또 태종이 가보(家寶)로 여기던 어금(御琴)도 하사받았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덕화역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에 있다. 첫째부인 순창 신씨와 함께 합장하였고, 둘째부인 평산 신씨의 무덤은 묘소 아래에 있다. 희령군이타를 제향하던 사당 이정사(夷靖祠)는 원래 동대문 밖에 있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불타버렸다. 1792년(정조 16) 경상도 예천에 사당을 다시 짓고 희령군을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고 제향하였다. 태종이 희령군에게 하사한 거문고인 어사금(御賜琴)은 사당 아래 별감(別監)에 있다. 이정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94호이고, 어사금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41호이다. 고종 때 현록대부(顯祿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증되었다.

첫째부인 순창 신씨는 신숙생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둘째부인 평산 신씨는 신사렴의 딸인데, 3남을 두었다. 장남은 화성군(花城君)이감(李堪)이고, 차남은 영원정(寧原正) 이배(李培)이며, 3남은 곡강정(曲江正) 이게(李垍)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전주이씨대관(全州李氏大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