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양현(興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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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흥양현은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인데 고려 1285년(고려 충렬왕 11)에 고흥현으로 승격하고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태조 4)에는 왜구를 피해 관청을 이사하여 보성군의 속현인 조양 땅으로 옮겨 갔다. 1397년(태조 6)에는 조양에 진을 설치하고 그곳의 병마사가 현의 일을 겸하였다. 1409년(태종 9)에 고흥현이 관할해 오던 1향 1소 1부곡을 폐지하여 고흥현에 편입하였다. 1439년(세종 21)에는 조양에 설치했던 진을 고흥현으로 통합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흥양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감(縣監)을 두었으며, 흥양진(興陽鎭)을 설치하였다. 1455년(세조 1)에 흥양현이 전라도 흥양진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흥양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순천진에 속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흥양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1285년에 고흥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으로 승격시켜 감무를 두었는데, 유비(柳庇) 또는 유청신(柳淸臣)으로 불리는 이곳 출신이 통역으로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395년에 왜구 침입 때문에 관청을 보성군 속현인 조양 땅에 옮겨 붙여 살게 하였으며, 1397년에는 조양에 진(鎭)을 설치하고 그곳의 병마사(兵馬使)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한 것으로 되어 있다.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고흥현이 관할해 오던 1향 1소 1부곡이 폐지되어 고흥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향은 은촌(犾村)이고, 1소는 유곡(楡谷)이며, 1부곡은 총곡(葱谷)이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흥양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흥양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고 그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흥양현은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1397년에 병마사(兵馬使)가 판현사(判縣事)를 겸직하다가, 1423년(세종 5)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41년(세종 23)에 그것이 현감으로 변경되었다. 『여지도서』에는 흥양현에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20인, 아전 41인, 지인(知印) 12인, 훈도 6인, 관노 15인, 관비 20인, 사령(使令) 22인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흥양현은 상긴(上緊)으로 분류된 진도와 더불어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올라 있는 자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전라좌수영 아래 육지의 행정 구역인 다섯 고을(5관)과 수군의 행정 구역인 다섯 진포(5포)를 두었다. 그중 흥양현 1관, 녹도·발포·사도·여도 4포가 흥양현에 집중 설치되었다. 유사시에는 5관 5포의 관할권을 전라좌수사 밑에 두고 5관 5포의 수령들이 수군 작전에 협력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흥양현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전초 기지 역할을 맡았다.

변천

1439년에 조양에 설치한 진을 고흥현에 통합하였다(『세종실록』 21년 12월 27일). 1440년(세종 22)에 고흥현을 남양에 합속시키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현의 이름을 새로 정하는 논의가 있었다. 전라도 남양현의 경재소에서는 남양현에 치소(治所)가 있으니 남양현과 고흥현의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남흥현으로 하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의정부에서는 고흥의 칭호가 이미 오래되었고 남양은 본디 속현이었다는 이유로 뒷 글자를 하나씩 따서 흥양현으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에 고흥진 설치의 필요성도 논의되었다(『세종실록』 22년 6월 15일) (『세종실록』 22년 7월 18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441년에 장흥부 두원 땅으로 옮기고, 보성군의 남양현을 떼어서 합쳤으며, 흥양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감으로 하였다. 같은 해에 흥양진이 설치되었다(『세종실록』 23년 2월 7일).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흥양현을 전라도 흥양진의 중익으로 삼았다. 좌익은 보성으로 하였으며, 우익은 장흥·해남·강진으로 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흥양현이 순천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前營)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72년(고종 9)에 삼군부가 흥양현에 별포수(別砲手) 5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9년 3월 24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흥양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흥양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완도군의 득량도와 돌산군의 금산·봉래·옥장 3개 면을 편입하여 고흥군으로 개편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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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