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희전(孝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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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효의왕후처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효희전은 정조의 비 효의왕후의 혼전이다. 효의왕후는 좌참찬(左參贊)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희(孝禧)’로 정하고(『순조실록』 21년 3월 17일), 7개월 뒤 건릉(健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정조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효희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자 환경전(歡慶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7개월 뒤인 9월에 정조의 무덤인 건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순조실록』 21년 9월 14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효희전이다.

효희전은 창경궁 통화전(通和殿)에 설치하였다(『순조실록』 21년 3월 14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효희전은 효의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희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것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반우한 뒤 삼우제(三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상제(祥祭), 담제(禫祭)를 모두 효희전에서 거행하였다. 초우제는 산릉 길유궁(吉帷宮)에서, 재우제(再虞祭)는 시흥(始興) 행궁(行宮)에서 지냈다.

1823년(순조 23) 5월 1일 부묘 하루 전, 순조가 효희전에 나아가 예고제(豫告祭)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지내고 명정문(明政門) 밖에 나아가 신련(神輦)을 맞이하여 받들고 태묘에 나아간 뒤 재숙(齋宿)하였다. 다음 날인 5월 2일에 효의왕후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효희전은 효의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821년 9월 14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823년 5월 2일까지 창경궁의 통화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창경궁의 통화전이 혼궁으로 사용된 적은 있으나 ‘통화전’이라는 전각명을 띤 채 혼전으로 사용된 것은 효희전이 처음이었다.

참고문헌

  •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孝懿王后國葬都監儀軌)』
  • 『효의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孝懿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