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전(孝昭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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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인원왕후처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각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효소전(孝昭殿)은 숙종의 두 번째 계비(繼妃) 인원왕후의 혼전으로,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이다. 1757년(영조 33)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소(孝昭)’로 정하고(『영조실록』 33년 4월 2일), 5개월 뒤 숙종과 숙종의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우강(右崗)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숙종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효소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757년 3월 26일 인원왕후가 창덕궁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하자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 7월에 명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내리고, 그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영조실록』 33년 7월 12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효소전이다.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정하였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효소전은 인원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소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것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모두 효소전에서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효소전에서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혼전에서 거행한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왕후의 혼전에서 조제(弔祭)한 의절이다. 대개 왕후의 혼전에서 조제할 때에는 기존의 혼전을 두고 임시로 다른 곳에 혼전을 가설하였다. 효소전의 치제(致祭)는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에서 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막상 조칙사(弔勅使)가 왔을 때에는 선정전이 아닌 창경궁의 함인정(涵仁亭)에서 조제를 받았다(『영조실록』 33년 9월 21일).

1759년(영조 35) 5월 6일 인원왕후의 신주를 효소전에서 받들어 내어 종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효소전은 인원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57년 7월 12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59년 5월 6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효소전이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인원왕후빈전도감의궤(仁元王后殯殿都監儀軌)』
  • 『인원왕후혼전도감의궤(仁元王后魂殿都監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춘관통고(春官通考)』
  • 이현진, 「조선 왕실의 혼전」,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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