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사전(孝思殿)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창경궁에 있던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장렬왕후처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효사전은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의 혼전이다. 장렬왕후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1688년(숙종 14) 장렬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사(孝思)’로 정하고(『숙종실록』 14년 9월 2일), 5개월 뒤 휘릉(徽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인조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효사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88년 8월 26일 장렬왕후가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승하하자 환경전(歡慶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12월에 휘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그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숙종실록』 14년 12월 16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효사전이다.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효사전은 장렬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사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것과 같다.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모두 효사전에서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효사전에서 행하였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그밖에 혼전에서 거행한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왕후의 혼전에서 ‘조제(弔祭)’한 의절이다. 대개 왕후의 혼전에 조제할 때에는 기존의 혼전을 두고 임시로 다른 곳에 혼전을 가설하였다. 장렬왕후의 경우에는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를 지냈으나 어느 장소에서 거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90년(숙종 16) 10월 10일 장렬왕후의 신주를 효사전에서 받들어 내어 종묘에 부묘하고 부태묘제(祔太廟祭)를 지냈다. 따라서 효사전은 장렬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88년 12월 16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690년 10월 10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효사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장렬왕후빈전도감의궤(莊烈王后殯殿都監儀軌)』
  • 『장렬왕후혼전도감의궤(莊烈王后魂殿都監儀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