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빈김씨(孝嬪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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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4년(단종 2)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宗)의 후궁. 거주지는 서울이다. 태종이 왕자일 때 들인 후궁이다.

태종의 후궁

김효빈(金孝嬪)은 조선 1대 왕인 태조(太祖)의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몸종으로 신덕왕후와 함께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다. 그러다가 태종(太宗)이 왕자이던 시절 태종의 마음에 들어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몸종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목인해(睦仁海)가 타고 있던 태종의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쳐서 스스로 제 집 마구간으로 들어온 일이 있었다. 이때 원경왕후는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태종과 함께 죽으려 하였는데, 시녀였던 김효빈 등이 만류하였다.(『정종실록(正宗實錄)』 2년 1월 28일)

경녕군의 탄생

1399년(정종 1) 9월 태종이 송도(松都)의 추동(楸洞)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느 날 날은 새려 하여 별은 드문드문한데, 흰 용이 침실(寢室) 동마루 위에 나타났다. 그 크기는 서까래만 하고 비늘이 있어 광채가 찬란하였으며, 꼬리는 꿈틀꿈틀하고, 머리는 태종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시녀였던 김효빈이 처마 밑에 앉았다가 이를 보았는데, 달려가서 집찬인(執饌人) 김소근(金小斤) 등 여덟 사람에게 알리자 김소근 등이 함께 나와 이를 보았다. 조금 있다가 운무(雲霧)가 자옥하게 끼더니 간 곳을 알 수 없었다.[『태종실록(太宗實錄)』 총서] 이 이상한 징조는 김효빈이 태종이 왕이 될 징조를 보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김효빈은 태종과의 사이에서 경녕군(敬寧君)이비(李裶)를 낳았다. 김효빈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효순궁주(孝順宮主)로 봉해졌다가, 1872년(고종 9) 고종(高宗)이 봉작을 고치라 하여 효빈(孝嬪)에 봉해졌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9년 12월 1일]

한편 김효빈은 1454년(단종 2) 세상을 떠났는데, 단종은 부의(賻儀)로 쌀과 콩 20석 및 종이 80권, 정포(正布) 20필과 관곽(棺槨)을 내려주었다.(『단종실록(端宗實錄)』 2년 2월 26일)

묘소와 후손

김효빈(金孝嬪)의 무덤은 경녕군의 3남인 오성군(梧城君)의 부부 묘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 교문 1동에 있다.

김효빈은 태종과의 사이에서 1남을 두었는데, 1남 경녕군은 참의(參議)로 찬성(贊成)에 증직된 김관(金灌)의 딸 청풍 김씨(淸風金氏)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경녕군은 청풍 김씨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1남은 고양군(高陽君)이질(李秩), 2남은 은천군(銀川君)이찬, 3남은 오성군(梧城君)이치, 4남은 영선도정(永善都正)이리(李利)이다. 한편 경녕군은 태종 대부터 세조(世祖) 대까지 왕실과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조 등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정종실록(正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이미선, 「조선 초기의 후궁」, 『사학연구』96,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