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전(孝明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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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궁·창경궁에 있던 영조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효명전은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의 혼전이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숙빈최씨(淑嬪崔氏)이다. 1776년(영조 52) 영조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명(孝明)’으로 정하고(『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5개월 뒤 원릉(元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3실에 부묘할 때까지 효명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776년(영조 52)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자 경희궁의 편전(便殿)인 자정전(資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7월에 원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7월 28일). 이때 경희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효명전이다.

효명전은 경희궁의 태령전(泰寧殿)에 설치하였다. 그 뒤 1777년(정조 1) 7월 28일 존현각(尊賢閣)에 도둑이 들면서 혼전을 마련한 전각에 변동이 생겼다. 이틀 뒤인 7월 30일 정조는 8월에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겠으니 영조의 혼전을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8월 6일 오시(午時)에 효명전을 창경궁으로 옮겼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효명전이 경희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효명전은 영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명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반우한 뒤 재우제(再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초우제(初虞祭)는 현궁(玄宮)에 재궁을 내리던 날 산릉에서 지냈다.

1778년(정조 2) 5월 2일 영조와 정성왕후(貞聖王后)를 종묘 정전 제13실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효명전은 영조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76년(정조 즉위) 7월 28일부터 1777년 8월 6일 창경궁으로 옮기기 전까지 경희궁의 태령전에, 1777년 8월 6일부터 영조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78년 5월 2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효명전이 있었던 경희궁은 고종대까지 존속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고, 창경궁의 문정전은 그 이전부터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해 온 전각이었다.

참고문헌

  • 『영조국장도감의궤(英祖國葬都監儀軌)』
  • 『영조혼전도감의궤(英祖魂殿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泰東古典硏究』27, 2011.
  •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