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옹주(孝明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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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7년(인조 15)~1700년(숙종 26) = 64세].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仁祖)의 딸. 봉호는 효명옹주(孝明翁主).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인데, 진도(珍島)와 통천(通川), 이천(利川)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어머니는 가선대부(嘉善大夫)조기(趙琦)의 딸인 귀인 조씨(貴人趙氏)이며, 배다른 오빠가 효종(孝宗)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자점(金自點)의 손자이자, 김식(金鉽)의 아들인 낙성위(洛城尉)김세룡(金世龍)과 혼인하였다. 1651년(효종 2) <궁중 저주 사건>과 <김자점의 옥(獄)>이 발생하면서, 어머니 귀인 조씨를 비롯하여 남편 김세룡 등이 모두 처형되었으나, 효명옹주는 오빠인 효종의 비호로 관작이 박탈된 채 유배에 처해지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효종의 배려로 서울로 돌아와 살았으나, 끝내 복권되지는 못하였다.

출생 및 어린 시절

효명옹주(孝明翁主)는 인조의 고명딸로, 1637년(인조 15) 인조와 후궁 조씨(後宮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조는 효명옹주가 자식 가운데 유일한 딸이기도 했거니와,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침통한 국가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매우 애지중지하였다. 게다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 조씨의 딸이었던 까닭에 그 애정은 더욱 특별하였는데, 후궁 조씨는 효명옹주를 낳은 직후 종4품에 해당하는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

효명옹주가 성장하는 동안 인조는 옹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사실 인조는 인렬왕후(仁烈王后)와의 사이에서 낳은 넷째, 다섯째, 여섯째 아들을 각각 6살, 1달, 사흘 만에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효명옹주가 태어나자마자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바람을 신생아 용품 하나하나에 불어 넣었다. 온갖 악귀를 물리치도록 처리한 배냇저고리를 비롯하여 벼락 맞은 나무, 주목(朱木)의 껍질 등을 수집하며 효명옹주가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옹주를 재액으로부터 지키고자 하였다. 효명옹주는 인조의 이러한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듯 다행히 건강하게 자랐는데, 생김새뿐만 아니라 영리하며, 욕심 많은 것까지 어머니를 닮았다고 전해진다.

효명옹주는 1640년(인조 18)과 1645년(인조 23)에 각각 숭선군(崇善君)이징(李澂)과 낙선군(樂善君)이숙(李潚), 두 남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옹주의 어머니인 숙원 조씨는 계속 품계가 높아져서, 1645년(인조 23) 10월 2일에 소의((昭儀)가 되었고, 1649년(인조 27) 2월 11일에 종1품에 해당하는 귀인이 되었다. 사실 인조는 1638년(인조 16) 왕후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대신들의 충고 때문에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였지만, 숙원 조씨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숙원 조씨는 계속하여 품계가 높아질 수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숙원 조씨는 내명부(內命婦)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다. 한편 두 남동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효명옹주에 대한 인조와 귀인 조씨의 애정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효명옹주를 아껴서, 훗날 숭선군의 보모가 숭선군이 어리석고 말도 어눌한 까닭에 귀인 조씨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숭선군의 종들이 딸은 이렇게 편애하면서 아들은 어찌 이리 미워하기만 한단 말이냐고 하며 원통하게 울었던 적이 있다고 진술한 것이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남아 있을 정도이다.

김자점 가문과의 혼인

인조와 귀인 조씨의 편애 속에서 자란 효명옹주는, 1647년(인조 25) 6월 24일에 효명옹주로 책봉되었고, 그 해 8월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당시 효명옹주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조선시대 공주들은 일반적으로 10대 초·중반에 혼인을 하였다. 효명옹주의 부마로는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세룡으로 결정되었는데, 할아버지는 당시 권력자이던 김자점이고, 아버지는 김자점의 둘째 아들 김식이었다. 즉 효명옹주와 김세룡의 혼인은 왕실과 당대 최고 권력자 집안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김세룡이 처음부터 부마로 낙점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인조가 부마 간택령을 내리고 재간택을 할 때 후보자는 판서(判書)정태화(鄭太和)의 아들과 정언(正言)홍중보(洪重普)의 아들, 그리고 김세룡으로 이때의 낙점자는 정태화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의였던 옹주의 어머니 조씨는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을 사위로 삼고 싶어 하였는데, 김세룡은 사주팔자와 궁합에서 밀려 재간택 때 3위로 낙점된 상황이었다. 이에 소의 조씨는 김자점과 논의 끝에 김세룡의 사주를 좋은 사주로 바꾸기로 하고, 간택 단자에 올라간 김세룡의 사주가 잘못되었다며 좋은 사주로 바꾸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세룡은 최종 간택에서 부마로 간택되면서, 낙성위에 봉해졌다.

혼인 후 2년간 효명옹주는 김세룡과 떨어져 궁궐에서 살다가, 1649년(인조 27) 4월 19일 출합(出閤)을 하였다. 이 출합 직전인 그 해 1월 효명옹주의 동생인 숭선군이 신익전(申翊全)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그러자 소의 조씨는 불사(佛事)를 벌여 효명옹주의 출합과 숭선군의 혼인을 기념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도봉산의 내원암(內院菴)에 큰 불상 하나와 작은 불상 하나를 조성하고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이 때 소의 조씨가 불사의 대부분을 시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효명옹주는 많은 관심과 보호 속에 혼인과 출합을 하였다.

궁중 저주 사건과 김자점의 옥사

1649년 출합 직후 효명옹주는 자신의 삶을 바꿀 만한 큰 사건을 겪게 되는데, 바로 아버지 인조의 사망이다. 효명옹주가 출합을 하던 음력 4월 19일은 양력 5월 해당하여 날씨가 더워지는 시기였다. 그런데 그 해 날씨가 유난하여 낮과 밤의 기온 차가 매우 컸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렸다. 인조도 이때 감기에 걸렸는데, 증세가 악화되다가 결국 음력 5월 초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왕위를 잇게 되면서 정국은 재편되었다.

우선 효종은 인조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귀인 조씨 및 김자점과의 거리를 분명히 하기 시작하였다. 귀인 조씨와 효명옹주를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북벌 정책을 반대하던 김자점을 1650년(효종 1) 홍천(洪川)으로 유배보냈다. 그런데 귀인 조씨와 김자점은 이러한 상황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효종이 세자 자리에 오르는 데는 귀인 조씨와 김자점의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세자빈 강씨(姜氏)가 청(淸)에서 돌아온 후 인조는 병이 들었다. 인조와 귀인 조씨는 이것을 저주 때문이라 생각하고, 세자빈 강씨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귀국 2달 만에 소현세자가 급사함에 따라, 새로운 세자를 책봉해야만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이 10세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리다며 자신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대하여 조정 대신들이 모두 반대를 하였으나, 김자점과 영의정김류(金瑬)만이 인조의 뜻에 찬성하였고, 결국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세자빈 강씨의 인조에 대한 불만은 점차 높아졌다. 그런데 이무렵 세자빈 강씨의 측근 궁녀들이 무당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이 귀인 조씨 귀에 들어왔고, 귀인 조씨는 무당과 접촉한다는 궁녀의 방에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귀인 조씨가 넘어지면서 이 일은 인조까지 알게 되었고, 이 사건은 <궁중 저주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게다가 궁궐 곳곳에서 저주물이 발견되고, 인조가 먹을 전복 구이에서 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결국 인조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이때도 대신들은 사건이 애매하다며 세자빈 강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였으나, 김자점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가 사사된 후, 김자점은 곧 영의정이 되었다.

이렇듯 소현세자가 죽은 후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있을지도 모를 잠재적 불안을 없애는데 귀인 조씨와 김자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이 자신들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자, 귀인 조씨와 김자점은 매우 서운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의 입지마저도 줄어들게 되었다. 또 다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그들은 난처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1651년(효종 2) 11월 귀인 조씨와 효명옹주는 효종과 대비(大妃)인 장렬왕후 조씨를 저주했다며 <궁중 저주 사건>의 배후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사건은 귀인 조씨가 효명옹주의 여종인 영이(英伊)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으려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숭선군의 부인이 자신의 이모인 장렬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장렬왕후가 영이를 불러 이를 꾸짖자, 당황한 영이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다가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를 원망하며 무당 등과 수상한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장렬왕후가 이것을 효종에게 알렸고, 효종은 영이와 영이가 언급한 무당 등을 국문하였다.

이때 김자점의 반역 사실도 드러났다. 그 해 12월 이영(李暎)과 신호(申壕)가 자신들의 장인이자 귀인 조씨의 종형(從兄)인 조인필(趙仁弼)이 김자점과 서로 내통하였으며, 반역의 정상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이미 <궁중 저주 사건>과 관련하여 귀인 조씨의 종형인 조인필에 대한 국문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에 겁을 먹은 이영과 신호가 이들의 음모를 먼저 밝힌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 저주 사건과 반역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건의 중요성은 커졌고, 모든 대신들이 국청(鞫廳)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효명옹주의 몸종인 업이(業伊)가 효명옹주가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뼛가루를 담아서 대내(大內) 및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집에 뿌렸고, 그 외에 다른 더럽고 흉한 물건도 많이 묻었다고 진술하였다. 게다가 이에 그치지 않고, 효명옹주가 임금을 없애고 낙성위김세룡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는 진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과 관련된 김자점 및 김자점의 아들들과 손자, 조카 등이 국문을 당한 후 처형되었으며, 그 외에도 관여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 이들의 국문 기록을 살펴보면 왕으로 세우는 사람에 대하여 김식과 숭선군 둘 다 거론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결국 효종은 역모 혐의로 귀인 조씨와 낙성위김세룡을 사사하였다. 이때 김세룡은 17세였으며, 효명옹주는 15세였다. 효명옹주의 경우에는 대신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처벌 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자신의 혈육이며 인조의 딸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비호한 덕분에 작위만을 박탈된 채 진도(珍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어 효명옹주는 효종의 배려로 통천(通川)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며, 유배 기간에도 의약품과 의복 등을 하사받았다.

김세룡의 처

유배를 당하고 7년 후인 1658년(효종 9) 효명옹주는 효종의 배려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복권되지는 못하여 죽을 때까지 ‘김세룡의 처’로 불리다가 1700년(숙종 26)에 64세의 나이로 단 한 명의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효명옹주가 죽은 후 숙종(肅宗)이 초상을 치룰 수 있게 상수(喪需)를 내려주라고 하면서, 마폐 문서에 ‘전(前) 효명옹주’라고 써서 발인하도록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후 신하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옹주의 작호를 내린 것을 거두어 달라고 하였으나, 숙종은 공주들에게는 따로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계속하여 ‘김세룡의 처’라고 하고 있으며, 숙종 또한 효명옹주가 아닌 ‘전 효명옹주’라고 하였다는 점에서 복호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일화 속 효명옹주의 성격

어린 시절 아버지 인조와 어머니 귀인 조씨의 편애 속에 자란 탓에 효명옹주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가장 유명한 일화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전하고 있다.

1648년(인조26)에 효명옹주가 혼례를 치른 후 잔치를 벌였는데, 이때 여러 종실 부인들도 참석을 하였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려 할 때, 효명옹주와 인조의 3남이자 옹주의 오빠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 사이에서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효명옹주는 자신이 비록 서출(庶出)이기는 하지만, 왕의 딸로서 귀하기 때문에 마땅히 복천부부인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복천부부인은 자급(資級)은 비록 아래일지 모르지만 적서(嫡庶)의 차례로 자리를 정해야 하며, 자신은 정실인 대군의 부인이기 때문에 윗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 사이에는 전혀 양보가 없었는데, 인조가 이 소식을 듣고 효명옹주를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효명옹주와 복천부부인 사이가 많이 틀어졌다고 한다. 한편 이것을 지켜보았던 효종은 이후 공주들이 결혼할 때에는 복천부부인을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지두환, 『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0.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 지식하우스, 2008.
  •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 이순자,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평단, 2011.
  • 김세봉, 「효종초 김자점 옥사에 대한 일연구」, 『사학지』34, 2001.
  • 김용흠, 「조선 후기 역모 사건과 변통론의 위상 - 김자점 역모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70,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