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청(回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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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안료로 사용된 코발트를 일컫는 말.

개설

회청(回靑)은 청화백자의 안료로 사용된 코발트를 말한다. 중국에서 원나라 이후 이슬람 즉 회회국(回回國)에서 수입해 왔으므로 회회청(回回靑) 또는 회청이라 하였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 나오는 청화 안료는 별도로 토청(土靑)이라 불렀다.

내용 및 특징

회청은 코발트 안료로서 발색이 선명하며 고온에서도 잘 견디는 성질 때문에 청화백자를 제작하는 주요 안료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사용할 때에는 먼저 회청의 원석인 코발트광을 잘게 부수고 정제한 후 백토와 석회석, 장석 등과 같은 보조제와 혼합하여야 한다. 회회청의 회는 당·송대의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즉 서역을 뜻하는 말로 회회청이란 곧 서역에서 유입된 푸른색 안료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서역에서 수입한 이것을 회청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이용하여 청화백자를 생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화원들이 중국 연경(燕京)에서 수입해야 했던 고급 안료로 고온에서도 잘 견뎌야 하므로 다른 보조제와 알맞게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코발트를 한 번 구운 후 백토와 석회석 등을 섞어 연마, 정제하여 사용하였다.

회청은 원산지별로 나뉘는데 페르시아산 청화 안료는 망간 성분이 아주 적고 철분을 비교적 많이 함유한다. 따라서 청화의 발색이 농염하고 청색이 진한 부분은 흑색 반점이 있다. 반면에 중국산 청화 안료는 망간 성분이 많고 철분을 적게 함유해 회색빛이 나는 청화 발색을 하며 흑색 반점이 없다.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전기에 주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회회청을 사용하였다. 청화안료를 수입에 의존한 조선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상황 변화에 따라 청화백자의 생산에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에서 내부 사정으로 인해 1435년부터 1464년까지 30년 동안 경덕진(景德鎭)의 운영이 사실상 공백기에 접어들면서 황실용 자기 생산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안료 구입이 어려워져 국내산 토청을 구하려 한 기록들이 보인다.

경덕진은 송나라 경덕 연간(1004~1007년)에 강서성(江西省) 부량현(浮梁縣)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고 어의를 받들어 궁정용 자기를 제작한 곳이었다. 경덕진은 남송대부터 중국 청백자와 백자의 대표 요장이었으며, 이후 중국 도자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경덕진 일대 가마는 송나라 때에도 수십 군데 이상 존재하였다. 원료는 인근 고령이나 기문, 무원 등지에서 창강(昌江)의 수로를 이용하여 공급되었다. 또한 창강을 이용해 생산한 자기를 중국 남·북방 전역으로 운송하였다.

회회청을 구하기 위한 노력은 세조 연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1463년(세조 9)에는 회회청을 구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전라도경차관 구치동(丘致峒)이 회회청을 강진에서 얻어 바쳤으며(『세조실록』 9년 5월 24일), 같은 해 윤7월에는 경상도경차관이 여러 고을의 산물을 바쳤다. 이처럼 강진과 순천, 경상도 울산·밀양·의성 등지에서 회회청과 유사한 돌을 채취하여 실험하는 등 회회청을 찾으려는 시도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세조실록』 9년 윤7월 3일). 이듬해인 1464년(세조 10) 8월까지도 청화 안료를 찾으려 했던 기록이 있다. 전라도경차관 구치동이 순천부에서 회회청과 비슷한 돌을 캐냈는데, 사기(沙器)에 그림을 그려 구워 제작하는 것이라고 하여 백자의 장식 안료로 사용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세조실록』 10년 8월 7일). 같은 해인 1464년 9월에 경상도관찰사가 울산군에서 나는 심중청(深重靑), 토청, 삼청(三靑)을 채취하여 바친 기록이 있어 오랜 기간 동안 청화 안료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세조실록』 10년 9월 13일).

안료를 찾으려는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1469년(예종 1)의 기록을 보면 세조 때 이미 행했던 강진현의 회회청 채취 실험보다 더 구체적이다(『예종실록』 1년 10월 5일). 청화 안료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만큼 노력과 독려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코발트가 아니라 산화철이나 산화크롬이 섞인 광물로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코발트광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코발트 안료는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중국산 코발트로 추정되는 토청과 유사한 것조차 산출되지 않아 청화백자는 귀한 물건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헌종(憲宗)성화 연간(1465~1487년)에 중국이 다시 안정을 되찾자 자연히 코발트의 수입이 재개되었고, 이에 따라 회청을 찾는 기록 역시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1480년대에는 중국의 회청을 공식적으로 수입하여 분원(分院)에서 청화백자를 만들 때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488년(성종 19) 왕실용 청화백자에 쓰일 회청을 명나라에서 사 오도록 했지만 명나라에 갔던 조선 사신들이 회청을 구입해 오지 못하여 단죄의 대상이 되었으며(『성종실록』 19년 1월 23일), 1541년(중종 36)에도 중국에서 회회청을 무역해 오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중종실록』 36년 12월 28일). 이 두 기록에 의하면 성종 연간부터 중종 연간까지 중국을 통해 청화 안료인 회회청의 구입이 지속적으로 시도되었으며 세조 연간에 시도된 국내산 안료의 시험 번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계속 수입 안료에 의존하여 청화백자를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말기에는 일본에서 수입된 왜청(倭靑)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각 시대 별로 청화의 색상이 다른 것은 이처럼 사용 원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하재일기(荷齋日記)』
  • 국립대구박물관, 『우리 문화 속의 중국 도자기』, 국립대구박물관, 2004.
  • 김영원, 『조선전기 도자사』, 일조각, 2011.
  • 김윤정·박경자·방병선 외 6인, 『한국도자사전』, 경인문화사, 2015.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3.
  • 방병선, 「하재일기를 통해 본 조선말기 분원」, 『강좌 미술사』 34호, 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 전승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