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부(淮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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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회양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회양 지방을 통치하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시대에 이물성(伊勿城)으로 부르다가 교주단련사(交州團練使), 방어사(防禦使), 회주목(淮州牧) 등으로 명호가 변경되었고, 후기에 이르러 회양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가 되었고, 진관(鎭管) 체제에서 거진(巨鎭)으로 회양진(淮陽鎭)이 설치되어 주변의 진을 관장하였으며, 후기에 부사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 각련성군(各連城郡)이라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연성군(連城郡)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이물성이라 개명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4) 10도제에서 삭방도(朔方道)에 편제되었고 교주단련사로 삼았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방어사로 개명하였다. 5도양계 체제에서 교주도(交州道)에 편제되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 철령(鐵嶺)이 적병을 파수하는 데 공이 있다 하여 회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315년(고려 충선왕 2)에 모든 목(牧)을 혁파하면서 이름을 회양(淮陽)으로 고치고 회양부로 삼았다.

조선 1413년(태종 13) 8도제가 시행되면서 강원도 소속으로 회양도호부가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회양도(淮陽道)를 설치하고, 금화는 좌익(左翼)으로, 금성은 우익(右翼)으로 편제하였다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는 진관 체제에서 회양진을 설치하고 인근의 6개 군현진(郡縣鎭)을 관장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610년(광해군 2)에 조방장(助防將)을 두었고, 1618년(광해군 10)에 철령에 축성할 때 방어사를 두었다. 1695년(숙종 21)에 철령에 요충지를 신설하여 토포사를 배치하고 금성·흡곡·통천·고성·간성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부사(府使), 교수(敎授) 각 1인을 배치하였다. 부사는 3품 문음직(文蔭職)이었다. 부사의 자문기구인 향청(鄕廳)에는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3인을 두었다. 6방(六房) 관속으로는 군관(軍官) 30인, 아전(衙前) 34인, 지인(知印) 20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15명, 군뢰(軍牢) 7명, 관노(官奴) 42명, 관비(官婢) 38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객사(客舍)를 비롯해 아사(衙舍), 관청(官廳), 부사(府司), 향청, 작청(作廳), 군관청(軍官廳), 관노청(官奴廳), 군기청(軍器廳), 훈련청(訓練廳), 사령청(使令廳) 등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4)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강릉부와 춘천부로 나뉘었다. 아울러 군현제가 폐지되고 각 고을은 군으로 단일화되었다. 이때 회양은 춘천부 산하의 군으로 편성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춘천부와 강릉부는 합쳐져 강원도가 되었으며, 이때 회양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