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감영(黃海監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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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관찰사가 주재하면서 도내 수령들의 치적을 평가하고 군사 관련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 기구.

개설

황해감영(黃海監營)은 황해도의 해주나 황주, 연안 등 대읍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다스리고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황해도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 속하였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신라 영토가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태봉이 차지하였고, 고려시대에는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누었을 때 관내도(關內道)가 설치되었다. 예종 때 5도(道) 양계(兩界) 제도를 실시하면서 서해도(西海道)라 불렸다. 1389년(고려 창왕 1)에 해주에 처음 관찰사영을 설치하였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에 서해도의 명칭을 풍해도라 고쳤으며(『태조실록』 3년 6월 23일), 1417년(태종 17)에 다시 황해도로 바꾸었다(『태종실록』 17년 12월 3일).

조직 및 역할

감영의 우두머리 관찰사로는 종2품 문관이 보임되었으며 2년간 근무하였다. 관찰사는 관내 황주와 해주 2목(牧), 옹진·곡산·연안·장연·평산·풍천 6개 부(府), 배천·신천·금천·봉산·재령·수안·안악 7개 군(郡), 신계·문화·서흥·장련·은율·강령·송화·토산 8개 현(縣) 수령들의 치적을 살피고 고과(考科)를 매겼다. 조선전기에는 병마사를 따로 두지 않고 관찰사가 겸하였으며, 군사는 시위군 2,294명, 영진군 2,736명, 선군 3,997명이 도내 각 읍에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감영 직속으로 도사(都事)와 중군(中軍)이 각 1인씩 있었으며, 비장 8명, 화사(畵師) 비장 1명, 기고관 8명, 기패관 50명, 천총 3명, 파총 10명, 초관 48명, 마병별장 2명, 마병초관 6명, 각고 감관별장 21명, 작령 출신 437명, 별무사 400인, 향기사(鄕騎士) 700명, 별무군관 400명, 관향군관 100명, 전향군관(轉餉軍官) 1,000명, 별초군관 672명, 순영리 27명, 관향영리 22명, 진무(鎭撫) 39명, 의생 23명, 통인 130명, 영노 41명, 기생 25명, 비자(婢子) 10명, 나장 40명, 군뢰 100명, 취수(吹手) 100명, 기수 100명이 있었다. 그 밖에 예조에서 보내는 심약(審藥), 형조에서 파견된 검률(檢律), 사역원에서 선발하여 보내는 역학(譯學)이 있었다.

변천

1449년(세종 31)에 관찰사영을 해주에서 황주로 옮겼으며 해주에는 따로 병마사영을 두었다(『세종실록』 31년 8월 25일). 관찰사영은 1451년(문종 1)에 다시 해주로 옮겼고(『문종실록』 1년 2월 27일), 1593년(선조 26)에는 연안으로 옮겼다가(『선조실록』 26년 7월 29일), 1601년(선조 34)에 다시 해주로 이동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에 23부제를 실시하면서 황해도 지역의 여러 읍을 개성부와 해주부에 분속하였고 황해감영은 폐지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 실시로 황해도가 다시 설치되었으나 감영 대신 도청이 설치되어 도내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