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청보(黃靑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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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강계군에 설치한 군사시설 진보(鎭堡).

개설

황청보는 평안도 강변(江邊) 7읍(邑) 중 하나인 강계군(江界郡)에 설치되었던 군사시설이다. 강변 7읍은 압록강 이북으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중에서도 강계군은 압록강의 상류 지점에 위치하여 적이 침입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지목되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이미 18세기 초반 강계군에는 평안도에서 가장 많은 10개의 진보가 촘촘하게 설치되었고, 4,605명 이상의 군병이 배속되어 있었다. 황청보는 강계부에서 만포진(滿浦鎭)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강계부에서 북쪽으로 30리(약 11.8㎞) 정도 떨어진 황청동(黃淸洞)에 위치하였다. 황청보는 강계부에서 만포진으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설치되었다. 황청보는 하천을 사이로 욋괴진과도 마주 보고 있었다. 황청보가 소속되었던 강계부는 조선초기부터 북방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곳으로 대규모 적이 침입해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강계부에는 많은 진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압록강 변으로는 고산리진(高山里鎭)·벌등진(伐登鎭)·만포진(滿浦鎭) 등 규모가 큰 진이 설치되었고, 내지(內地)에는 욋괴진(夞怪鎭)·상토진(上土鎭)·종포진(從浦鎭)·추파진(楸坡鎭)·마마해보(馬馬海堡)·평남진(平南鎭)·신광진(神光鎭) 등이 도로 곳곳에 배치되었다.

황청보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외적의 방어와 감시였다. 황청보와 같은 진보는 평안도의 강변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또한 강계부의 진보는 다른 지역과 달리 군사적 기능 외에도 채삼(採蔘)이라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진보의 군졸들은 인삼을 채집하는 기간이 되면 군사 업무를 잠시 뒤로하고 산에 올라가 인삼을 채취했다. 강계부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조선시대 국용 인삼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그 비중이 매우 높았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에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늦어도 연산군대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연간까지 유지되던 황청보는 여러 변란을 겪으면서 17세기 초반에는 크게 쇠퇴하였다. 최현(崔晛)의 『인재집』에 따르면, 17세기 초반 황청보에는 군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최현 역시 황청보를 혁파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황청보는 병자호란 이후 강계부의 건자포보(乾者浦堡)·등공구비보(登公仇非堡)·이동보(梨洞堡)·고협보(古冾堡) 등과 함께 혁파되었다.

형태

1500년(연산군 6) 목책을 설치했는데 둘레가 720척(약 218.2m)이고, 높이가 6척(약 1.8m)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07년(선조 40) 6월 24일 황청보의 권관청(權管廳) 밖 뜰이 비와 습기로 인하여 포척(布尺)으로 너비 3척(약 1m), 깊이 10척(약 3m)만큼 함몰되었다. 성안의 땅이 꺼진 변고는 매우 희귀한 일이어서 강계부사이계선(李繼先)이 평안감사박동량(朴東亮)을 통해 조정에까지 보고하였다(『선조실록』 40년 윤6월 15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인재집(訒齋集)』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