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목(黃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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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에 있으며 북쪽으로 평안도 중화, 동쪽으로 평안도 상원과 황해도 수안, 남쪽으로 황해도 서흥·봉산, 서쪽으로 서해에 이르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황주목(黃州牧)은 의주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황해도 초입에 있는 군사 요충지이자 황해도의 계수관(界首官)이었다. 황주를 지나면 서흥·평산·금천을 거쳐 개성으로 곧바로 통하기 때문에 황해도 방어의 중심으로 중시되었고, 1601년(선조 34)에는 황해병영이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으로 우동어홀(于冬於忽) 또는 동홀(冬忽), 동울(冬鬱)이라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취성군(取城郡)으로 바뀌었다. 태봉이 세워진 후 황주라는 지명이 정해져 지금까지 이어진다. 고려시대 983년(고려 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두었을 때 황주목이 되었으며, 993년(고려 성종 12)에 절도사주로 개편되어 천덕군(天德郡)이라 하였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절도사 대신 안무사가 파견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다시 목으로 바뀌었다. 5도(道) 양계(兩界)의 지방제도 실시로 서해도(西海道) 소속이 되었다. 1217년(고려 고종 4)에 거란의 침입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고려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으며, 1269년(고려 원종 10)에 원나라 동녕부(東寧府)에 예속되었다가 9년 후 고려의 영토로 수복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황주목으로 환원되었고 서북면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1388년(고려 우왕 14)에 다시 서해도 소속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에 해주와 함께 서해도의 계수관이 되었다(『태조실록』 2년 11월 12일). 평안도 의주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義州大路)가 경유하는 황해도 초입의 주요 관문이었으므로 황주에서 봉산으로 가는 영애(嶺隘) 방어를 위해 두 읍 경계에 있는 극성(棘城)에 진을 설치하는 등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다.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정3품 목사가 보임되었으며, 별감 3명, 군관 300명, 아전 49명, 훈도 14명, 공생(貢生) 36명, 의생(醫生) 5명, 서원(書員) 8명, 나장 26명, 군뢰 28명, 관노 42명, 관비 51명이 있었다. 황해도의 거진인 황주진관이 되어 관하에 평산·곡산도호부, 봉산·재령·수안·안악·신천군, 신계·토산·문화·장련현 11개의 제진(諸鎭)이 속했다.

변천

황주에는 1449년(세종 31)에 감영이 설치되었으나(『세종실록』 31년 8월 25일), 얼마 후 1451년(문종 1)에 해주로 옮겨졌고, 황주목사는 극성절제사(棘城節制使)를 겸하였다(『문종실록』 1년 2월 27일). 1601년에 황해병영이 설치되었다.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후 황해도 지역 방위를 위해 황주에서 봉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극성의 산산진(蒜山鎭)을 첨사진으로 격상시켰다(『숙종실록』 8년 1월 3일).

1824년(순조 24)에 임금을 비방하는 흉서를 지닌 자가 발각되어 목에서 강등되어 황강현(黃岡縣)이 되었다가(『순조실록』 24년 12월 27일), 1834년(순조 34)에 다시 읍호와 읍격이 회복되었다(『순조실록』 34년 1월 2일). 1895년(고종 32)에 전국 23부제를 시행하자 황주군이 되어 평양부에 속하였으며, 이듬해에 13도제 시행과 더불어 다시 황해도 황주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황주목(黃州牧)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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