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두(黃錫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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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13년(순조 13)~1866년(고종 3) = 54세]. 조선 후기 헌종(憲宗)~고종(高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루가. 자는 재건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연풍과 서천이다. 아버지는 황주면(黃周冕)이며, 할아버지는 황한굉(黃漢宏)이다.

헌종~고종 시대 활동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황석두(黃錫斗)는 15세에 혼인을 하고 21세 때 한문 선생의 권고로 천주교 서적을 접한 후 입교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부친의 허락을 받기 위해 3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였고 마침내 그를 박해하던 부친과 다른 가족들도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1845년(헌종 11) 페레올(Ferreol) 주교가 입국한 이후에는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았으며, 다블뤼(Daveluy) 신부로부터는 신부가 되기 위한 신학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자, 서천으로 이주하여 1858년(철종 9)부터 페롱(Feron) 신부의 활동을 보좌하는 복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황석두는 조안노(Joanno) 신부와 베르뇌(Berneux) 주교를 돕는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도 활동하며 교회 서적 번역에 참여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우포청등록(右捕廳謄錄)』]

1866년(고종 3) 1월 병인박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26일 다블뤼 주교와 위앵(Huin) 신부 및 오메트르(Aumaitre) 신부가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었는데, 이때 황석두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포졸들은 황석두를 체포하지 않았으나, 자신 스스로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하여 함께 홍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 포도청에서 혹독한 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황석두는 그해 2월 7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충청도 보령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인 2월 14일 갈매못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2월 8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2월 7일]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양자인 황천일(黃千日)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본가로 옮겼다가 홍산 삽틔에 장사를 지냈다.

한편 황석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우포청등록(右捕廳謄錄)』
  • 『치명일기(致命日記)』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
  • 원재연, 「성 황석두(黃錫斗, 1813~1866)의 생애와 활동」, 『교회사학』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