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언보(黃士彦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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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성부에 설치한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다수의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황사언보가 소속된 경성부(鏡城府)는 1411년(태종 11) 3월에 경원진(慶源鎭)이 폐지된 후 경성에 새롭게 진을 설치하고 길주(吉州) 이남의 군사들을 부방하게 하면서 군사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세종대에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등 육진 지역이 개척되면서 본격적으로 방어체제가 정비되었다. 황사언보는 조선초기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중종 연간에 혁파되었다.

위치 및 용도

황사언보는 경성부 중심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보화보(寶化堡) 인근에 설치되었다. 경성부에서 명천군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설치되어 적군을 방어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변천 및 현황

1522년(종중 17) 함경도절도사우맹선(禹猛善)은 함경도로 침입하는 도둑들의 통로인 황사언동(黃士彦洞)과 장군파(將軍坡) 등에 일찍이 보를 쌓기는 했지만 병마가 적고, 무기를 갖추지 못해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황사언보는 요충지임에도 외떨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다른 진들보다도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우맹선은 근방의 명천군·길주군 등의 군사를 합병하여 방어에 투입할 것을 제안하였다(『중종실록』 17년 6월 24일). 이 기사는 내지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황사언동에 보를 쌓으면서 황사언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사언보는 군병과 군기가 부족하여 운영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524년(중종 19) 약 5일간 큰비가 내리면서 황사언보의 성은 무너져 내리고, 성을 쌓았던 돌들도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다. 성문과 성안의 민가도 모두 떠내려가면서 남은 군졸들은 보로지(甫老知)의 옛 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에 함경북도절도사이기(李芑)가 황사언보를 폐지하고 보로지와 보화에 두 보를 다시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중종실록』 19년 7월 14일). 얼마 뒤에도 조정에서 황사언보가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물에 떠내려가고 묻혀서 다시 설치할 곳이 없을뿐더러 적들이 침입하는 경로가 너무 많아서 방어도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중종실록』 19년 7월 25일). 이 기사를 끝으로 황사언보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대로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