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탕평(皇極蕩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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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을 중심으로 추진된 탕평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황극탕평은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에 연원을 둔 논리이다. 즉 왕도(王道)를 바탕으로 해서 군신과 상하가 특정한 당파에 편중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내용 및 특징

황극은 『서경』의 「홍범(洪範)」편에 제시된 것으로, 왕이 백성을 위해 지극한 표준을 세워 함께 복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탕평의 의미가 첨가되어 사사로운 당(黨)을 경계하였다. 즉 황극탕평의 정신은 왕도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 군신 상하의 지극히 공정하고 바른 자세와 무편무당(無偏無黨)이 요구되는 특징이 있다(『숙종실록』 36년 윤7월 8일).

조선에서 황극의 논리는 16세기 이후 이이(李珥)나 윤근수 등에 의해서 검토되다가 17세기 후반 박세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황극탕평론이 제창되었다. 박세채의 논리는 현실 정치에서 군주에게 시비(是非) 판정을 맡기는 군주 중심 정치론의 핵심이었다. 사림 정치에서 사림이 공론에 의해서 시비를 판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논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황극탕평론은 왕도 정치와 반(反)붕당의 논리이고, 왕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왕의 정치적 조정이나 결단을 보장하였다.

변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은 이후 영조대 탕평파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764년(영조 40) 박세채를 문묘에 종사할 때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정조의 경우도 「어제황극편서」에서 황극을 가리켜 붕당을 타파할 수 있는 논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황극은 결국 황극탕평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 김준석, 「탕평책 실시의 배경」, 『(신편)한국사』32, 국사편찬위원회, 1998.
  • 우인수, 「조선 숙종조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의 노소중재(老小仲裁)와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 『역사교육논집』19, 1994.
  • 정만조, 「조선시대 붕당론의 전개와 그 성격」,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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