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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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宋)나라의 학자이며, 문인인 소옹(邵雍, 1011~1077)이 지은 책.

개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이며, 문인인 소옹(邵雍, 1011~1077)이 지은 책이다. 소옹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어냈다. 그는 음(陰)ㆍ양(陽)ㆍ강(剛)ㆍ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저작하여, 천지 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2편에서 허심(虛心),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詩體)의 시집(詩集)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지 사항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7.4cm 가로 16.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저자 소옹은 호가 안락선생(安樂先生)이고, 자는 요부(堯夫)이며,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소강절(邵康節)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河南]에서 살았으며,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ㆍ천문(天文)ㆍ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연간(嘉祐年間, 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지냈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ㆍ양(陽)ㆍ강(剛)ㆍ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 W. F. 라이프니츠의 2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이 책은 세종 때의 훈민정음의 이론 및 언어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며, 『성리대전(性理大全)』 권7~13에 실려 있다. 이 책의 권2(성리대전 권8)에는 경세연역도(經世衍易圖)ㆍ경세천지사상도(經世天地四象圖)ㆍ경세천지시종지수도(經世天地始終之數圖)ㆍ경세육십사괘수도(經世六十四卦數圓)ㆍ경세일원소장지수도(經世一元消長之數圖)ㆍ경세사상체용지수도(經世四象體用之數圖)ㆍ정성정음도(正聲正音圓)가 있어 조선시대의 학자들을 매혹시킨 것이다.

신숙주(申叔舟)의 『동국정운서(東國正韻序)』와 『황극경세서』의 종과(鐘過)의 주석을 비교하면, 신숙주가 종과의 글을 그대로 옳긴 느낌이 짙은 곳도 있다. 이 중 ‘정성정음도’는 운서 연구의 한 모델로서 본시 소옹(邵雍ㆍ시호 강절(康節))의 『황극경세성음창화도(皇極經世聲音唱和圖)』가 전해지지 않아, 채원정(蔡元定)이 꾸민 『경세성음도(經世聲音圖)』 곧 『정성정음도(正聲正音圖)』가 오늘에 남은 것이다. 이를 『성음도(聲音圖)』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뒤의 소백온(邵伯溫) 이하의 학자들의 주석을 행한 것이 서경덕(徐敬德)인데, 그의 『성음해(聲音解)』는 바로 이 성음도를 주석한 것이나, 별로 새로운 것은 없다.

실학(實學)시대에 들어와서, 최석정(崔錫鼎;1646~1715)은 『경세정운도설(慶世正韻圖說)』(일명 경세훈민정음)을 지었는데, 바로 이 『정성정음도』의 체재를 훈민정음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신경준(申景濬)도 이 『정성정음도』를 기반으로 하여,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을 엮어낸 것이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 호 頣齋)도 그의 『이수신편(理數新編)』 권12의 전반에 『황극경세서』를 싣고 한글로 자음을 표시했으며, 권9에는 서경덕의 『성음해』를 실었다.

또 실학시대에 학자들이 한글 글자(초ㆍ중ㆍ종성의 결합된 자)의 수를 계산한 것도 본서의 영향이다. 그러나 실학시대의 운서 연구가 크게 신장되지 못한 것은 당시의 학자가 중국 학자의 태도를 본받음에 둔감하고, 너무 이 『황극경세서』에 의존한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극경세’의 뜻은 소백온의 주(註)에서 밝혀진 샘인데, ‘황(皇)’은 ‘지대(至大)’의 뜻이고, ‘극(極)’은 ‘지중(至中)’의 뜻이고, ‘경(經)’은 ‘지정(至正)’의 뜻이며, ‘세(世)’는 ‘지도(至度)’의 뜻이라 한다. 여기서 ‘대중지정(大中至正)’이란 응변 무방(應變無方)의 도(道)를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이나 언어 사상을 알려면 이 『황극경세서』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서명응은 『하도(河圖)』와 소자(邵子)의 『황극경세서』를 기초로 그의 선천사상을 나타낸 책이 『선천사연』이다. 그는 논리전개의 틀로서 『하도』를 이용했고, 또 『하도』로 다양한 이론을 나타냈다. 그 중에서 독특한 것이 소자의 ‘복희64괘방원도’에서 내도(內圖)인 방도(方圖)가 정사각형(□)인데, 그는 마름모 모양(◇)으로 바꾸고, 이것이 소자의 뜻이라고 주장을 한다. 개작하는 원인은 소자가 말한 ‘이(離)와 감(坎)은 음양(陰陽)의 한계다. 그러므로 ’이‘는 인방(寅方)에, 감은 신방(申方)에 해당하는데 數가 항상 그것을 넘는 것은 음양의 넘침(溢)이다. 용수(用數)는 인(寅)에 불과하고, 교수(交數)는 신(申)에 불과하다’와 주자(朱子)가 말한 ‘이는 마땅히 리는 묘(卯)에, 감은 유(酉)에 해당한다는 說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갱의사(更宜思))에 있다고 했다. 즉 서명응은 주자가 속으로 ‘소자의 말대로 되면, 원도와 방도의 위치가 어긋난다.’라고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소자의 주장은 ‘이의 양기(陽氣)는 인에서 나오고, 묘에서 다하며’ 이 때(묘)를 수가 넘치고〔數定〕, 음양이 넘치는 지점〔氣盈〕으로 본 것이다. 감의음기(陰氣)와 신(申), 유(酉)의 관계도 같다. 여기서 ‘다한다, 넘친다’는 의미는 ‘꽉 찬다,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소자는 기가 무성하면, 기우는 것을 염려하여, 기가 가득 찬 시점을 수가 넘친다, 음양이 넘친다고 한 것이지 이 때문에 방도를 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호방평의 주장으로 정확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소자의 주장이나, 주자의 ‘갱의사(更宜思)’가 방도개작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다만 서명응이 주장하는 ‘하도중궁론(河圖中宮論)’에 기인하여, 방도를 마름모꼴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만의 ‘하도론’으로 이유가 있는 주장이다. 이것은 소자의 선천사상을 서명응식으로 변용한 것으로 한 걸음 전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권택룡,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 여조선운학지관계연구(與朝鮮韻學之關係硏究)」, 『동방한문학』 3권, 동방한문학회, 1987.
  • 김동준, 「최석정(崔錫鼎)의 어문관(語文觀)과 문명인식(文明認識)- 『경세정운오찬(經世正韻五贊)』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 42권, 한국고전문학회, 2012.
  • 유창균, 「황극경세서가 국어학에 끼친 영향」, 『석당논총』 15,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89.
  • 이숭녕, 「『황극경세서』의 이조후기 언어연구에의 영향」, 『진단학보』 32, 진단학회, 1969.
  • 조희영, 「서명응(徐命膺)의 『복희(伏羲) 64괘방원도(方圓圖)』 개작(改作)에 대한 검토(檢討)-『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선천사연(先天四演)』을 중심으로-」, 『율곡사상연구』 21권, 율곡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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