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포장(火砲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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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되어 중앙과 지방의 화포 및 화약 개발에 종사하던 장인.

개설

조선전기 화기는 해상에서 육지로, 화포 발사체가 화살류에서 돌과 철환으로, 그리고 화희(火戱)의 성행 등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화기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화포와 화약이 동시에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화기는 화포장, 화약은 화약장(火藥匠)이 중심이 되어 개발하였다. 세종대에는 군문(軍門)의 기계 중에서 중요한 것은 화포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였다(『세종실록』 12년 6월 20일). 여말선초부터 화기의 발달은 최무선(崔茂宣), 최해산(崔海山) 등이 주도한 일부 선각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화포의 전국적인 발달을 위해서는 전담 장인의 육성이 필요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화포장이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조정에서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 화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화포의 개발에 집중하였으나, 전국적으로 화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더욱이 감영이나 병영에조차 화포를 발사하거나 다루는 기술을 아는 자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한량(閑良) 및 영(營)과 진(鎭)에 소속된 군사 중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화포술을 익히게 했다(『세종실록』 12년 6월 20일). 그러나 단기간에 변방 지역의 화포 기술자를 양성하기는 어려웠다. 중앙에서 화포를 지방에 보내어 작동법을 익히게 하였으나 관리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처 방안으로 군기시나 군기감에 소속된 중앙 화포장을 파견하였다(『세종실록』 14년 12월 11일). 그런데 처음부터 많은 인원의 화포장을 지방으로 보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외적에게 포로가 되어 기술이 전습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중종실록』 39년 5월 29일). 1445년(세종 27)부터는 화약장을 화포장이라고 하여 화포의 제작에만 전념하게 했다. 당시까지 화약장은 화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전담한 직책으로 추측된다(『세종실록』 27년 8월 26일).

변천

화포장은 임진왜란 당시에 큰 활약을 하였다.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중국의 진천뢰를 저본으로 삼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훈련도감을 비롯한 오군영이 설치되면서부터 대형 화기보다는 조총을 중심으로 하는 단병전 위주의 전술이 구사되자 화포장의 기능이 축소되었다. 특히 조총은 화포장과 같은 전문적 기술이 없어도 누구나 단기간에 익힐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조총 중심의 오군영 운영은 화포에 대한 관심을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개항기까지 다양한 대형 화기를 개발하지만 조선전기와 같이 화포장이 화기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던 것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기효신서(紀效新書)』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 경인문화사, 2012.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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