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채번조(畵彩燔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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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하여 자기를 구워 만드는 방식.

개설

화채(畵彩)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은 “화채번조(畵彩燔造)를 금(禁)했으나 다시 곧 청채(靑彩)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청화 안료로 채색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화채번조는 청화백자(靑畫白磁)를 제작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숙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청화백자의 생산이 재개되었고, 장인들에게 사번(私燔)이 허용되고 장인 전속제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전기에 금제가 심했던 청화백자는 후기에 들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호사품으로 대부분의 계층에서 탐내는 물건이 되었다.

18세기 전반에 청화백자가 민간에까지 만연했던 실상을 영조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754년(영조 30)에 회청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사치스런 풍습이라고 하여 용준(龍樽) 외에는 청화백자의 제작을 금했다(『영조실록』 30년 7월 17일). 이후 정조대의 기록에서도 화채번조 즉 청화백자 제작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다.

변천

조선전기의 화채자기는 중국에서 청화 안료인 코발트를 수입해 와야 하고 시문을 화원들이 담당하는 사정 등으로 인해 왕실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최고급 자기였다. 종종 왕이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하였으나 종친을 비롯한 사람들의 사사로운 사용과 주문이 잇따랐다.

17세기에는 전란의 폐해와 중국의 내부 사정 등으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다. 이후 18세기에는 분원 장인들에게 사번이 허용되어 민간에 그릇을 내다 파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왕실뿐 아니라 민간의 취향도 그릇의 양식에 반영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팽배한 사치 풍조와 사회 경제적인 발전에 의한 신분 상승으로 이전보다 더 다양한 장식과 기교를 부린 자기가 제작되었다. 영·정조 연간에 백자와 청화백자 등을 내화보로 제작한 그릇 덮개인 갑발(甲鉢)에 넣어 번조(燔造)하는 고급 그릇의 생산을 정책적으로 금지하였음에도 청화백자는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청화백자는 정조 말년에 한동안 생산이 주춤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보다 화려하게 재생산되었다. 이는 정조대에 이미 사치와 풍요, 중국풍 장식에 대한 선호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청화백자는 하나의 상품이자 사치품으로 인식되어 폭넓게 사용되었다. 사옹원 분원의 공인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이 1891년부터 1911년까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작성한 『하재일기(荷齋日記)』의 기록을 통해 분원이 민영화된 이후에도 청화백자를 계속해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하재일기(荷齋日記)』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윤정·박경자·방병선 외 6인, 『한국도자사전』, 경인문화사, 2015.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방병선,「『하재일기』를 통해 본 조선 말기 분원」, 『강좌미술사』 34, 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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