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성(火王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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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의 근거지로 활용된 경상도 창녕군에 위치한 산성.

개설

화왕산성은 화왕산(火王山, 花旺山) 남쪽 봉우리를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처음의 축성은 삼국시대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가야의 산성으로 사용되다가 가야 멸망 이후 남북국시대까지 신라의 산성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후 조선전기 태조대에 수축되었으나 성종대에 이미 폐성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慶尙右道) 일대를 주 무대로 활동한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의 근거지로 사용되면서 수축되어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18세기에는 폐성(廢城)이 되었다. 현재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용도

화왕산은 창녕의 읍치(邑治), 즉 읍 수령의 업무 공간 소재지 바로 뒤에 위치한 곳으로 창녕의 진산(鎭山), 곧 해당 지역을 보호한다고 여겨지는 산이다. 화왕산은 비슬산(琵瑟山)의 줄기로 인근의 현풍(玄風), 영산(靈山) 등의 고을과 연결된다. 화왕산성은 화왕산의 바위산인 북쪽 봉우리를 배경으로 삼아 남쪽 봉우리를 둘러쌓은 모습으로 축성되어 있다.

화왕산성은 위치상 창녕의 수비를 담당하는 산성인 동시에 현풍, 대구 등 다른 경상도 고을과 연결되는 길목을 수비하기 위한 산성이었다. 특히 화왕산에서부터 창녕을 거쳐 낙동강까지 넓은 평야가 펼쳐져서 수비에 유리했다. 창녕은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기 때문에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 및 관군의 경상도 지역 수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화왕산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축성된 가야의 산성으로 생각된다. 창녕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비화가야(非火伽倻) 때 쌓았다고 하며 인근에서 신라 진흥왕 척경비(拓境碑)가 발견되었다. 산성 안의 연못에서는 목간(木簡)을 비롯한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가야 멸망 이후 남북국시대까지 신라의 산성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기록이 없으나 조선 건국 초인 1410년(태조 10) 경상도와 전라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과정에 함께 수축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석성(石城)으로 성의 둘레는 1,217보(步)이며 성안에는 군창(軍倉)이 있었고 3개의 연못과 9개의 샘이 있었으며, 봉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적(古蹟)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미 폐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16세기에는 군사적으로 활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왕산성이 다시 축성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일본과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던 중 조선은 경상도의 모든 백성을 산성에 집결시키고 들을 비워 보급을 차단하는 청야(淸野)의 전법을 채택하였고 그 과정에서 의병장 성천희(成天禧)의 상소와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주장에 따라 화왕산성을 축성하였다.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곽재우의 책임하에 창녕현감이영(李英)이 창녕, 현풍, 영산, 청도의 백성들을 동원해 축성이 이루어졌다(『선조실록』 29년 11월 20일). 이후 1596년(선조 29) 7월 곽재우는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지키게 되었고, 그해 8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공격을 받지만 성을 지켜냈다.

이처럼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수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지만 전쟁 이후에는 크게 군사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고종대 편찬된 『대동지지』에는 모두 화왕산고성(火王山古城)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허물어져 못 쓰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현재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화왕산성은 화왕산 정상부의 평평한 지역에 돌로 쌓은 성이다. 동문과 서문이 있는데 성벽은 앞뒷면을 모난 자연석과 가공석을 섞어 사다리꼴로 쌓았다. 서문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으나, 너비 1m, 높이 1.5m가량의 거석(巨石)을 정연하게 쌓은 동문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성안에는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세 곳의 연못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여지도서』에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와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설화 중에 화왕산이 등장한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이광옥(李光玉)에게 예향(禮香)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몸이 매우 허약했지만 어떤 약을 써도 효험도 없었는데, 어떤 이가 화왕산의 영험한 연못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는데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구름이 끼어 예향이 사라졌다. 며칠 후 예향이 연못에서 솟아났는데 병이 나아 있었고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 조(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예향의 꿈에 한 사내가 나타나 자신이 용의 아들인 옥결(玉玦)이며, 아이의 아버지라 하였다. 이광옥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조를 성으로 내려주었다. 이가 바로 창녕조씨의 시조이며 후에 진평왕의 부마가 되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이장희, 『임진왜란연구』, 아세아문화사, 2007.
  •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의 산성 축조와 전투」, 『지역과 역사』33, 부경역사연구소, 2013.
  •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 대응과 후대의 기억」, 『한국사상사학』46, 한국사상사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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