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洪州牧)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충청남도 홍성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홍주목(洪州牧)은 조선시대 충청도에 속한 목(牧)이다. 고려시대의 명칭은 운주(運州)였다.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목으로 승격하였다. 15세기에 호수가 1,379호, 인구가 6,031명이었다. 토지는 11,386결인데, 논이 절반에 약간 못 미쳤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57명, 진군(鎭軍) 178명, 선군(船軍) 400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홍주부가 되었다가, 1896년(고종 33)에 홍주군이 되었다. 1914년(순종 7)에 결성군과 통합해서 홍성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홍성군의 지명은 삼국시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명칭인 운주가 처음 나타난 것은 934년(고려 경순왕 8)에 고려 태조왕건이 운주 전투에서 승리한 기사부터이다. 이 전투를 계기로 왕건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후삼국의 패권 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운주는 충청남도 서부를 관할하는 주요 거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982년(고려 성종 2)에 12목을 설치할 때는 포함되지 않았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운주에 도단련사를 파견하였으며, 1012년(고려 현종 3)에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지운주사를 설치하였다. 그 후에 홍주로 고쳤다.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목으로 승격하였다. 1368년(고려 공민왕 17)에 다시 지주사로 강등하였다가,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다시 목으로 복구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홍주 임내로 편입된 속현들은 삼국시대부터 유래가 있다. 15세기에 홍성에는 5개의 속현과 1개의 부곡이 있었다. 신평현(新平縣)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신평현으로 고치고,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운주의 임내가 되었다. 여양현(黎陽縣)은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신량현(新良縣)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1018년에 운주의 임내로 삼았다가 그 후에 여양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1395년(태조 4)에 감무를 폐지하고 다시 홍주의 임내로 삼았다. 고구현(高丘縣)은 백제의 우견현(牛見峴)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목우현(目牛縣)으로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1018년에 운주의 임내로 삼았다. 흥양현(興陽縣)은 일명 흥원군(興遠軍)이라고도 한다. 고려 1018년에 홍주의 임내로 삼았는데, 조선시대에는 목장(牧場)이 되었다. 합덕현(合德縣)은 덕풍현(德豐縣)의 부곡이었다. 고려 1298년(고려 충렬왕 24)에 이 고을 사람 황석량(黃石良)이 원나라에서 환관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현으로 승격시켰다가 홍주에 붙였다.

홍주는 충청도 서부의 중심지로 이 지역의 행정,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홍주목은 태안·서산·면천의 3개 군과, 해미·당진·덕산·예산·청양·결성·보령·대흥의 8개 현을 관할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군사적 거점이었으나 조선에서는 병영과 수영이 해미현에 위치하면서 경제적 역할이 커졌다. 홍성군은 각종 해산물의 생산지로 33개의 어량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정3품 목사이다. 목사 아래에 종5품 판관 1명을 두었다. 18세기에 판관은 음서 출신자로 임명하였다.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4명, 주군관(州軍官) 50명, 아전 45명, 지인 22명, 사령 21명, 관노 9명, 관비 8명이 속해 있었다.

진관 체제에서 홍주목에는 종3품 첨절제사를 두었다. 종4품 동첨절제사는 홍주진관과 서천, 서산, 태안, 면천, 온양, 대흥, 덕산에 두었다. 대흥과 덕산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절제도위를 두는 지역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승격하였다. 종6품 절제도위는 평택, 홍산, 청양, 비인, 결성, 남포, 보령, 아산, 신창, 예산, 해미, 당진에 두었다. 한편 판관은 절제도위를 겸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하였다.

조선후기에 영장제도를 시행하면서 정3품 영장을 파견하였다. 전·후·좌·우·중영의 5영 중에서 홍주에는 전영장을 두었다. 영장의 휘하에는 군관 51명, 진리(鎭吏) 3명, 지인 6명, 군뢰(軍牢) 20명이 있었다.

변천

홍주목은 18세기에 27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가호는 편호 11,591호, 인구는 남자 21,355명, 여자 27,705명이었다. 토지는 밭 6,802결, 논 5,547결이었다.

1661년(현종 2)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분실하였다는 이유로 홍주목을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하고 도명도 충홍도(忠洪道)에서 충공도(忠公道)로 고쳤다(『현종실록』 2년 윤7월 10일). 10년 후에 복구하였다가 1710년(숙종 36)에 부모를 상해한 강상죄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다시 홍양현으로 강등하였다가 복구하였다(『숙종실록』 36년 12월 11일). 경종대에 다시 강등하였다가 1732년(영조 8)에 복구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역적 이진채(李振采)와 한광우(韓光友)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홍주목을 홍양현으로 강등하고 인천부 소속으로 옮겼다(『순조실록』 12년 3월 28일). 이후 10년의 기한이 지나서 다시 복구하였다.

1895년에 23부제를 시행할 때 홍주부로 승격하여 인근 22개 군을 관할하였으며, 1896년에 13도제를 시행하면서 홍주군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결성군과 통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