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역(紅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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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 바이러스의 감염에 의해 일어나는 급성 전염병.

개설

조선시대에 홍역(紅疫)은 마진(痲疹)·홍진(紅疹)·당두역(唐痘疫)이라고도 불렸는데, 두창(痘瘡), 즉 천연두 등과 함께 조선시대 영유아의 사망률을 높였던 주요 질병 중 하나였다.

내용 및 특징

홍역은 ‘평생 안 걸리면 무덤에서라도 걸린다’는 속담처럼 계층,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질병이었는데, 특히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크게 위협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홍역이 발생하면 옥중의 죄인을 풀어주거나 각종 행사를 중지하였고, 반대로 쾌차한 후에는 대사면을 단행하거나 축하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민간에서 홍역이 대규모로 유행했던 정조대에는 홍역의 치유 의례로서 국행 의례인 여제(厲祭)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는 "무릇 역질 따위에는 모두 귀신이 있어서 여역(癘疫)·두역(痘疫)·진역(疹疫)의 모든 귀신들이 무엇을 아는 듯이 서로 전염시키고 있다. -중략- 어리석은 백성은 귀신에게 이리저리 빌기를 잘 한다. 이는 무식한 짓이니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자신을 삼가서 귀신을 피하는 것만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하여, 홍역의 원인을 귀신에 의한 발병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양반을 비롯하여 여제를 설행(設行)한 왕실은 물론 민간에서도 그러한 인식은 마찬가지였다. 『예천 맛질 박씨가 일기』 등 19세기 일기 자료에는, 홍역을 치유하기 위해 성황제나 굿을 하는 등 의례를 통한 치료를 시도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런가 하면 ‘애들 홍역 할 때 부정한 곳을 다니면 나쁘다’, ‘홍역 할 때 비린 것을 먹으면 안 된다’ 등과 같이 민간에서 전해지던 말이나 행동, 먹거리 등 금기의 관행들이 아직까지도 다수 전해지고 있다. 홍역에 대한 금기는 왕실에서도 존재했다. 왕실에서 홍역을 앓는 자가 있으면 제사에 음악을 쓰는 것을 꺼려 제사 날짜를 다시 잡는 등의 금기가 행하여졌다. 또한 왕실이나 여항을 막론하고 홍역이 발생하면 정상인들이 피병(避病)하도록 환자의 처소를 옮기게 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홍역은 오늘날까지도 해열제 외에는 이렇다 할 치료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천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홍역의 질병사에 대해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을 인용하여 "마진이란 병은 옛날에도 있었으나 1613년(광해군 5)에 당두역이란 것이 유행되었는데 일명은 홍진이고 세속에서는 홍역이라 한다. 크게 유행되기는 1668년(현종 9)부터였다."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한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요즘에 와서는 또 홍진이란 역질이 있는데 이는 널리 퍼진 지가 아직 백 년이 차지 않는다."라고 하여 원래 존재했던 질병임은 확실한데 다만 17세기 후반부터 심각한 전염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초기 세자가 마진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과 여항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종대 이후 홍역이 전국적인 규모로 인명을 앗아간 재해로 등장한 시기는 1708년(숙종 33)이었다. 그 후 1729년(영조 5)과 1730년에는 일부 지역, 1786년(정조 10)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성호사설(星湖僿說)』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지봉유설(芝峯類說)』
  • 김두종, 『한국의학문화대연표』, 탐구당, 1966.
  • 신동원, 『조선사람의 생로병사』, 한겨레신문사, 1999.
  • 원보영, 「민간의 질병인식과 치료행위에 관한 의료민속학적 연구 -19~20세기 일기와 현지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 최내옥, 『한국 민간속신어 사전』, 집문당, 1995.
  • 프레더릭 F. 카트라이트·마이클 비디스 공저, 김훈 옮김, 『질병의 역사』, 가람기획,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