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포(號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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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행행할 때 펼치던 임시 군사훈련이나 대열 시에 왕의 친림(親臨)을 알리는 호령의 신호로 발사하던 포.

개설

왕의 기거동작에는 노부(鹵簿)와 의장을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과 호포(號砲) 등 신호를 할 수 있는 형명(形名) 및 기치(旗幟)를 동원하였다. 왕의 행차에서 호포를 사용한 것은 왕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오르는 경우와 군사훈련 때였다. 호포도 화약을 이용하여 큰 소리를 내는 군기였으므로 야외 활동에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호포를 발사하면 왕이 의식 장소에 임어했으며, 이는 곧 해당 행사가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내용 및 특징

『만기요람(萬機要覽)』의 형명 제도에서는 호포를 세 개의 안[眼]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호령을 내릴 적에는 한 번 발사하고, 세 번 발사하면 장중에 오르는 것이고, 정숙하라고 고함을 치거나 군영 문을 닫으라는 신호에는 일정한 횟수가 없었다. 예컨대 1778년(정조 2) 9월의 군사훈련에서 정조가 원문(轅門) 밖에 이르렀을 때 취타(吹打)를 중지하자 중영에서 호포 1발을 쏘아 소리를 내고 천아성(天鵝聲)을 불었다. 그러자 각 영의 군병들이 깃발을 점검하고 고함을 세 번 질렀으며, 그와 동시에 원문이 열리고 정조가 군진으로 들어갔다. 훈련을 마칠 무렵에는 장호적(掌號笛)을 불다가 북을 쳤다(『정조실록』 2년 9월 3일). 또한 1781년(정조 5)에 정조가 영우원(永祐園) 원행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사아평(沙阿坪)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에도 호포를 발사하자 깃발을 흔들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왕이 친림하는 군사훈련과 동일하게 강을 건너가는 경우에도 호포는 중요한 신호 수단이었다. 1669년(현종 10)에 현종이 한강을 건널 때는 호포가 발사되기를 기다린 후 시위 군병이 모두 강을 건넜다. 따라서 호포를 준비하지 못하면 왕의 행행이나 군사훈련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1787년(정조 11)에 훈련대장(訓鍊大將)이주국(李柱國)이 파직되었는데, 호포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정조실록』 11년 1월 3일). 정조가 단(壇)에 오를 때의 호포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는데, 근년에 대고(代鼓)가 많은 때인데도 호포를 발한 후에 해당 영(營)에서 대령하지 않았다며 부하 영솔을 못한 이주국을 벌한 것이다. 명령 전달의 신호로 사용하는 군기는 호포만이 아니라 의례 행사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1779년(정조 3) 8월의 남한산성 친림성조(親臨城操)의 기록을 보면, 대포(大砲) 1발을 쏘자 천아성을 불었고 각 군병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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