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대수(胡大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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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개설

조선에서 삼수병(三手兵)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요청한 장수로서, 1595년(선조 28) 7월에 왔으나, 사사로운 욕심과 그의 부하들이 조선인들에게 피해를 입힌(입혔기) 때문에 같은 해 12월에 명으로 소환되었다.

활동 사항

교련유격(敎鍊游擊)으로, 1595년 7월에 조선에 나왔다가 12월에 돌아갔다. 그는 조선에서 포를 쏘는 포수(砲手)와 활을 쏘는 사수(射手) 그리고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를 다루는 살수(殺手), 즉 삼수군(三手軍)을 교련할 수 있는 사람을 요청한 결과 파견된 인물이었다(『선조수정실록』 28년 7월 1일). 하지만 그는 스스로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제가 귀국에 온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군병을 조련하지 못하고 또 휘하를 단속하지 못하여 귀국에 소란을 피우게 하였으니, 모두 나의 죄입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군사훈련에 크게 힘쓰지는 않은 듯하다. 이는 호대수가 남방에서 병사를 훈련시키면서 폐단만 끼쳤다는 평가나(『선조실록』 33년 1월 7일), ‘유격의 졸도(卒徒)가 지방을 소란스럽게 하면서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내용으로 군문(軍門)에 보고한 조선의 자문(咨文) 때문에 호대수가 벌을 받고 떠나가기도 하였다는 『간이집』의 내용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는 조선에 은광 개발을 요구하였는데, 조선 정부가 소극적으로 나오자, 일부 지휘관들은 직접 은맥과 은혈(銀穴)을 찾으러 다니기도 하였다. 이때 유격호대수는 은광이 있는 곳을 모두 파악한 뒤 자신이 직접 강원도 평창으로 내려가 은을 채굴하기도 하였다. 조선 조정은 전란으로 강원도가 피폐해졌음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접대 문제 등을 우려하여 강원도행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행동하였다. 조선이 재정이 궁핍함에도 은을 채굴하여 이를 보충하려 하지 않은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8년 9월 30일).

그로 인하여 조선이 도움을 받은 일도 있다. 산삼을 캐기 위하여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잠입하였던 건주여진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여진인이 조선 영내에서 소를 훔쳐 가자, 위원군수김대축(金大畜)이 여진인을 죽인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 때문에 누르하치가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서북변 방어에 힘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호대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명의 권위를 빌려 누르하치의 침략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호대수는 참모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 지역으로 들여보내 누르하치를 잘 타이르도록 하였다. 1595년 11월, 여희원은 누르하치의 부장(副將)을 만나 여진인들이 조선 영내로 잠입한 것을 힐책하고, 조선에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조선은 여희원을 통하여 응급조치를 취한 후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간이집(簡易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