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청(湖南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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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난 후 호남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 업무를 맡아 보던 선혜청의 부속 관청.

개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경기선혜법을 시작으로 대동법·상정법을 한 세기에 걸쳐 강원과 호서·호남·영남·해서 지역에 확대 시행하였다. 전라도는 삼남 중에서도 토지결수가 가장 많고 충청도와 함께 연해(沿海) 조창(漕倉)을 통하여 세곡을 수송하는 조운 체계가 조선전기부터 정비되어 중앙정부의 세입 의존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이에 현물 공납을 토지세로 전환시킨 대동법을 시행할 때에도 정부 관료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도민들의 반발이 두드러져 논의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는 다른 도와 달리 1658년(효종 9) 호남 연해읍에 대동법을 먼저 시행하다가, 1662년(현종 3) 가을에 이르러서야 내륙 산읍까지 확대 시행하였다. 대동법을 이처럼 연해읍과 내륙 산읍에 나누어 시행하면서 대동세의 출납을 관장하는 호남청도 1658년(효종 9)에 처음 설치하였고, 1662년(현종 3)에 증설하였다. 청사는 설립 초기에는 경기선혜청·강원청·호서청과 함께 숭례문 안쪽에 합설하였다가, 대동법을 다른 도에 확대 시행하면서 소의문 안쪽 별청과 주자동의 남창에도 청사를 설립하였으며, 한강변에도 세곡 보관 창고를 18세기까지 증설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 김육(金堉)이 대동법 논의를 재개하였을 때만 해도 대동법은 호서뿐 아니라 호남 지역까지 확대 시행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1651년(효종 2) 우의정한흥일(韓興一) 역시 삼남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효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는 민원이 올라오고, 대동법을 시행하는 대신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민역(民役)이 균일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자는 신료들의 반대 의견으로 인하여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당해 8월 호서 지역에만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1656년(효종 7) 무렵 영돈령부사김육이 호남의 전·병선이 못 쓰게 되어 고을민들이 50~60필(匹)의 역포(役布)를 내기에 이르자, 재차 대동법 시행을 청하며 1결에 10두의 쌀을 걷어 과중한 역 부담을 덜어 주자는 안을 내놓았다(『효종실록』 7년 9월 15일). 이에 효종은 대동법 시행에 대한 전라도의 민심을 조사하게 하고, 중앙에서 공물주인을 통하여 조달해 쓸 경비 물자의 수량을 산출하여 과세 기준을 마련하게 하였다.

1658년(효종 9) 2월 여전히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산읍(山邑)보다 역 부담이 큰 연해 27읍에 한정하여 결당 13두를 과세하는 것으로 절목을 제정하였다[『효종실록』 9년 2월 9일 1번째사](『효종실록』 9년 7월 25일).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은 효종이 죽기 전 호남 산군(山群)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도록 하였음을 상기시켰다. 이후 이조 판서홍명하(洪命夏)와 김육의 아들인 공조 참판김좌명(金左明)도 대동법 시행을 지속적으로 요청함으로써 1662년(현종 3)부터 호남 산군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대동세는 당초 연해 고을에서는 13두로 거두었다가 1666년(현종 7)부터는 1두를 줄여 호남 전 고을에 결당 12두의 대동세를 거두었다(『현종실록』 7년 11월 6일). 이처럼 호남의 연해읍과 산간읍에 대동법을 점진적으로 시행해 가는 과정에서 호남청도 내청(內廳)과 강창(江倉)을 증설하였다.

조직 및 역할

현존하는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살펴보면, 호남청은 선혜청에 합설하고, 제반 절목은 호서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직제는 도제조와 제조가 경기·강원·호서청과 겸하게 하고, 낭청도 충청도의 소관낭청이 겸찰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산원은 강원청의 산원과 겸찰하고 서리 4명, 내외창고지기 3명, 사령 3명 역시 호서청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대동법을 6도에 시행하고 난 후 『속대전』에 기재된 선혜청의 직제를 살펴보면, 도제조 3명과 제조 3명(호조 판서 1명 예겸) 아래 낭청 4원을 두어서 낭청 1원이 각기 ①경기청과 영남청, ②강원청과 호남청, ③호서청, ④해서청·진휼청과 상평청의 회계 업무를 겸찰하도록 하였다. 1753년(영조 29) 이후로는 균역청까지 선혜청에 합설하여 선혜청낭청과 상진청서리 일부가 균역청의 업무를 겸하였다. 이처럼 선혜청은 18세기 중반 이후 각 선혜청과 상평청·진휼청·균역청을 합설한 거대 재정기구로 성장해 갔다.

변천

갑오개혁 당시 호조로 재정기구를 단일화하기 이전까지 호남청은 선혜청의 산하 기구로서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 업무를 맡았다. 호남청은 다른 청과 마찬가지로 내청과 강창 모두 곳간이 독립되어 있었고, 회계 문서도 별도로 작성·처리하였다. 다만 필요할 경우 다른 청에 재원을 옮겨 줌[移劃]으로써 선혜청 내부에서 재정 운영의 효율성을 꾀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선혜청에서 호조로 재원을 옮겨 주는 경향이 확대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선혜청의 재정 운영에도 여러 문제가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
  • 『호남청사례(湖南廳事例)』
  • 이정철,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1: 湖西大同法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15, 1961.
  •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2: 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20, 1963.
  •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3: 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21, 1963.
  •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4: 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24, 1964.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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