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선옹주 홍씨(惠善翁主 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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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宗)의 후궁. 기생 출신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기명(妓名)이 가희아(可喜兒)라 가이옹주(加伊翁主)로도 불렸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태종의 후궁

홍혜선옹주(洪惠善翁主)는 보천(甫川)의 기생 출신이었는데,(『태종실록(太宗實錄)』 14년 1월 13일)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종친과 공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고 전한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태종은 창기(倡妓)로서 나이가 15~16세가 된 자 6인을 뽑아 명빈전(明嬪殿)의 시녀(侍女)로 충당할 때 기명이 가희아였던 혜선옹주도 뽑혔다.[『태종실록』태종 12년 10월 28일 2번째기사] 이후 태종은 가무(歌舞)가 뛰어난 혜선옹주를 총애하여,[『태종실록』태종 14년 1월 13일 1번째기사] 한성부 관리들이 사용한 의막(依幕)을 혜선옹주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월 7일) 그리고 1414년(태종 14) 가희아를 혜선옹주에 봉했다.(『태종실록』 14년 1월 13일)

1415년(태종 15) 혜선옹주는 뇌물을 받았다는 구설수에 휘말렸는데, 전 황주목사(黃州牧使)염치용(廉致庸)이 노비 소송에서 패하자 공안부윤(恭安府尹) 민무회(閔無悔)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뜻밖의 변을 낳았다. 염치용이 자신의 종 서철(徐哲) 등이 큰 부자인데, 태종의 후궁인 홍혜선옹주와 영의정하륜(河崙)에게 뇌물을 주어 내섬시(內贍寺)에 속하게 됐다고 언급한 것이다. 민무회는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이 말을 전하였고, 충녕대군은 다시 태종에게 이를 전하였다. 그러나 이를 들은 태종은 부끄러운 말을 들으니 도리어 대신들을 보기 부끄럽다며 크게 화를 낸 후 조사를 지시하였다. 그리고 난언을 발설하였다며 민무회, 염치용, 권집지(權執智) 등을 하옥하였다.(『태종실록』 15년 4월 9일)

한편 관명(官名)인 가희아를 따라 가이옹주로도 불린 홍혜선옹주는 태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태종실록』태종 18년 7월 7일 2번째기사]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지두환, 『태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