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진(惠山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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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남도 갑산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혜산진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폐사군(廢四郡)에 연접한 탓에 적의 주요 침입로였다. 이로써 혜산진은 함경도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방 시설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었다. 혜산진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여진 부락들과 마주하였고, 여진인들이 이 지역에 의지하여 사는 경우도 있었으며, 조선으로 귀화하기도 했다. 본래 혜산구자(惠山口子)가 있어 천호를 두었고, 세조대 북쪽 정벌을 계기로 관방을 정비하면서 병마만호를, 다시 첨절제사를 두었다.

위치 및 용도

혜산진은 함경도 갑산부의 읍치에서 북쪽으로 90리(약 35㎞) 거리에 있는 혜산사(惠山社)에 위치한다. 여기서 북쪽으로 5리(약 2㎞)에는 백두산 서남쪽으로 흘러나와 허천강(虛川江)과 합류해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혜산강이 있었는데, ‘혜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혜산진은 백두산과 가장 인접한 곳에 있는 군사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1712년(숙종 38) 백두산 정계(定界) 당시 청의 사신 오라총관(烏喇總官)목극등(穆克登)이 정계를 위해 나왔을 때 머물기도 했고, 또 조선 측의 지리 조사를 혜산진첨절제사가 담당하기도 했다(『숙종실록』 38년 5월 5일) (『숙종실록』 38년 5월 15일). 혜산진은 폐사군과 인접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여진족의 잦은 침입에 노출되었고, 평안도와 함경남도 내지 혹은 함경북도의 경성 등으로 이를 수 있는 요충지로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변천 및 현황

혜산진은 본래 갑산군의 혜산구자였다. 설치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421년(세종 3) 석보를 개축했다는 논의가 확인된다(『세종실록』 3년 8월 28일). 세종대에는 사군의 개척과 관련한 관방 시설의 정비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백두산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갑산이나 혜산 등지는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혜산구자는 1433년(세종 15)에 이설이 논의되었고, 1435년(세종 17) 갑산의 읍치를 허천에서 혜산으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현지를 조사한 김종서(金宗瑞)의 반대로 무산되었다(『세종실록』 17년 4월 25일) (『세종실록』 17년 9월 27일).

혜산구자는 혜산강을 해자로 삼고 있었으며, 갑산의 울타리로 인식되었다. 1436년(세종 18) 정흠지(鄭欽之)는 혜산의 성이 험준하지만 낮고 작다는 단점이 있으므로 개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병조에서는 갑산의 읍성 공역이 완료되는 대로 혜산의 구자를 증축하기로 결정했다(『세종실록』 18년 11월 1일) (『세종실록』 18년 11월 27일). 1440년(세종 22)에는 도체찰사황보인(皇甫仁)이 삼수리(三水里)에 보를 축조하여 혜산과 성원을 이루도록 했고(『세종실록』 22년 7월 29일), 3년 뒤에는 갑산과 삼수 지역에 연대(煙臺)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1444년(세종 26)에는 1,000여 명을 동원하여 한 달여에 걸쳐 혜산의 석보를 개축하였는데, 둘레는 2,585척(약 783m)이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7일).

세종대 이래로 혜산구자에는 천호를 두어 석보를 관리하고 또 적을 방어하게 했으나, 1461년(세조 7)에는 병마만호를 두도록 했다(『세조실록』 7년 5월 8일). 1460년(세조 6) 신숙주(申叔舟)의 북방 정벌로 여진족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북쪽 변방의 긴장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혜산구자에 만호를 설치한 지 한 달여 만에 여진족이 혜산구자에 침입하여 18명을 살해하고, 83필의 말을 약탈해가는 사태가 발생했다(『세조실록』 7년 6월 21일). 이 사건을 계기로 함경도의 도체찰사한명회(韓明澮)는 종사관이극균(李克均)을 보내어 갑산진을 도호부로 삼고, 혜산구자는 첨절제사로 올리자고 건의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혜산구자는 첨절제사를 둔 진으로 승격되었다(『세조실록』 7년 8월 8일).

혜산진은 군사적으로 매우 전략적인 지점에 있었다. 이로 인해 갑산을 이설하자는 논의가 있었는가 하면(『성종실록』 6년 12월 12일),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북청에서 혜산 혹은 갑산으로 옮기자는 논의도 있었다(『성종실록』 17년 9월 8일) (『성종실록』 17년 9월 23일). 이 두 가지 의견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1492년(성종 23)에 이르러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겨울과 봄에는 갑산, 여름과 가을에는 혜산에 번갈아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북청에는 본영을 두어 세조가 이시애의 난 이후에 설치한 본뜻을 살리고자 했다(『성종실록』 23년 11월 16일) (『성종실록』 23년 11월 16일). 혜산진은 이로써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의 행영(行營)과 비슷한 기능을 하게 된다.

1502년(연산군 8)에는 정미수(鄭眉壽)가 여진인들의 입거로 인해 병마절도사가 혜산진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데 북청에 본영을 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하면서 갑산부로 옮길 것을 주장하여 대신들의 호응을 얻었다(『연산군일기』 8년 5월 19일). 그러나 본영은 여전히 북청에 유지되었고, 1509년(중종 4)에는 류순정(柳順汀)의 의견에 따라 혜산진에 행영을 두고 이를 위해서 성을 증축하기로 결정되었다(『중종실록』 4년 4월 29일). 이로부터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의 본영은 북청, 행영은 혜산진에 두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 갑산을 행영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중종실록』 7년 6월 24일). 1528년(중종 23)에는 혜산진의 지형이 노출되어 있어 행영으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인근의 운룡보(雲龍堡)로 행영을 옮기자는 의견이 나타났다(『중종실록』 23년 8월 13일). 이듬해 함경도관찰사성세창(成世昌)이 함경남도병마절도사윤희평(尹熙平)과 함께 이를 논의하여 운룡보로 행영을 옮기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대신 갑산과 혜산은 모두 중요하므로 갑산에 행영을 두고, 혜산진에는 병마우후가 유방(留防)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중종실록』 24년 5월 4일).

1734년(영조 10) 5월, 갑산의 유생 김숙명(金淑鳴) 등이 삼수와 갑산 등지의 토지와 관방 문제로 상소하여 혜산진과 운총보(雲寵堡)를 합쳐서 군(郡)을 설치할 것을 청하기도 했는데, 이종성(李宗城)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영조실록』 10년 5월 25일). 또 1751년(영조 27) 1월에는 좌의정김약로(金若魯)의 청에 따라 혜산진의 첨사는 고령(高嶺)·아이(阿耳)·다대포(多大浦)와 함께 변지과(邊地窠)가 되었다(『영조실록』 27년 1월 17일).

1883년(고종 20) 11월, 의정에서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魚允中)은 장계(狀啓)에 따라 갑산의 진동보(鎭東堡)와 운총보를 혜산진에 합설할 것을 건의하여 이루어졌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1895년(고종 32) 2월에는 군무대신서리(軍務大臣署理)권재형(權在衡)의 건의에 따라 혜산진을 갑산부에 합설하고, 갑산부에서 진장(鎭將)을 임명하도록 했다(『고종실록』 32년 2월 23일). 이후 혜산진은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면(惠山面)이 되었다가 1942년에는 혜산군이 신설되어, 그 안에 속하였고 이후에 시로 승격한다.

형태

혜산진은 본래 혜산구자의 석보였으나, 당시의 구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다. 여러 차례의 증축 필요성이 논의되었으나, 1444년(세종 26)에 이르러서야 둘레 2,585척 규모로 성을 고쳐 쌓았다.

1475년(성종 6) 9월,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강곤(康袞)이 혜산진 성안에 우물과 샘이 없고 내부가 좁아 인가가 조밀하므로 풍년을 기다렸다가 30여 보를 물려 쌓자는 장계를 올렸다(『성종실록』 6년 9월 17일). 혜산진의 성을 퇴축하는 작업은 12년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서북면에 둘레 380척, 높이 6척의 성을 다시 쌓았다(『성종실록』 18년 3월 29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혜산진성은 둘레가 2,320척(약 703m), 높이가 9척(약 2.7m)이며, 성안에 한 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수원(水源)의 확보를 위해 퇴축한 이후의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구만(南九萬)에 의하면 혜산진은 높은 언덕 위에 이중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것이 성종대에 이루어진 퇴축의 흔적이라고 한다. 혜산진 안에는 괘궁정(挂弓亭)이 북쪽 모퉁이에 있었다. 성의 인근에 혜산창(惠山倉)과 혜산역(惠山驛)이 있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학봉일고(鶴峯逸稿)』
  • 『약천집(藥泉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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