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방(玄方)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일본 강호시대에 대조선 외교교섭을 담당한 승려.

개설

임진왜란 직후 조일 국교교섭에 종사하였던 경철현소(景轍玄蘇)의 제자로, 현소의 뒤를 이어 조선과 일본의 외교교섭을 담당하였다. 일본 강호시대(江戶時代) 임제종의 승려로 무방규백(無方規伯)·방장로(方長老)라고도 불리었다.

활동 사항

1588년 구주(九州)의 박다(博多) 종상군(宗像郡) 출신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경철현소가 조선과의 교섭을 맡은 외교승이 되어 대마부중(對馬府中)의 이정암(以酊庵)에서 활약 중이었을 때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정암이란 현소가 창건한 암자로 그가 태어난 1537년의 간지인 정유(丁酉)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이정암은 그 후 강호시대를 통하여 조선과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장소가 되었다.

현소가 죽은 뒤 1611년에 그의 후계자가 되어 이정암의 제2대 주지가 되었으며,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1621년과 1629년 2회에 걸쳐 조선에 사자로 파견되어 왔다. 특히 1629년에는 일본국왕사의 정사로 조선에 건너가 수도인 한양까지 상경하였는데(『인조실록』 7년 4월 22일), 이것은 조선후기 한양까지 상경한 유일한 사절이다.

1632년 대마번에서는 번주 종의성(宗義成)과 중신 유천조흥(柳川調興)이 대립하여 유천조흥이 대마번에서 행하고 있던 국서의 위조를 강호막부에 폭로한 국서개작사건, 즉 유천일건(柳川一件)이 일어났다. 막부장군 덕천가광(德川家光)이 직접 판결을 내려 유천조흥이 패소하였는데, 당시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한 현방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1635년 남부번(南部藩, 성강(盛岡))으로 유배되었다. 24년간에 걸쳐 유배 생활을 하였지만 남부번에서는 빈객(賓客)으로 후한 접대를 받았다. 유배 기간 동안 많은 저작을 간행하고, 남부에 처음으로 청주양조법을 전하였다. 그의 나이 71세가 되던 해인 1658년에 사면을 받아 남선사(南禪寺)로 거처를 옮겼으며, 1661년 10월 23일 남선사의 말사인 대판(大阪) 구창원(九昌院)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현(현재) 장기현(長崎縣) 대마시(對馬市)의 서산사(西山寺)에는 현소와 그의 제자인 현방의 목상이 소장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무문관사초(無門關私鈔)』(별명 ‘自雲鈔’), 『삼교질의초(三敎質疑鈔)』가 있으며, 스승인 경철현소의 유작을 모아 놓은 『선소고(仙巢稿)』가 있다.

참고문헌

  • 손승철·유재춘 역, 『近世韓日外交秘史』, 강원대학교 출판부, 1988.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國書』, 中公新書,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