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의후(許儀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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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출신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임진왜란 당시 명에 정보를 전달한 인물.

개설

허의후는 복건성 출신으로, 왜구에 잡혀 포로가 되어 일본 살마주(薩摩州)에 끌려갔다. 이후 살마주 수장(守將)의 총애를 받게 되어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행상(行商)과 의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 계획에 관한 정보를 명에 처음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선과 일본이 연루되어 있다고 전달하기도 해서 조선의 외교적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활동 사항

허의후는 일본의 관백(關白)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파악했다. 그는 당시 동향 사람으로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주균왕(朱均旺)을 비밀리에 보내 절강성(浙江省)에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풍신수길이 여러 나라를 차지했으나 중국 관동(關東)만을 아직 차지하지 못하여, 경인년(1590년) 정월에 장수들에게 10만 병사를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풍신수길은 이들에게 성을 쌓아 4면을 막아놓고 지키도록 하면서 자신은 바다를 건너 명을 공격하겠다고 언급했다는 내용도 전달했다(『선조수정실록』 24년 5월 1일).

한편 『선조실록』에는 명나라 복건성의 행상 허의후 등이 조선이 일본에 나귀를 바치고 함께 모의하여 명을 침범하려 하며 조선이 침입의 선봉이 되기로 했다고 중국에 전달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선조실록』 25년 6월 18일).

당시 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군의 출병(出兵)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의후의 제보는 일본군의 출병에 관한 사실을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그가 조선과 일본의 연루설을 제보한 것은 잘못된 정보였으나 명은 이 때문에 상당 기간 조선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명의 지원을 바라고 있던 조선 역시 외교적으로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허의후는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에 건너와 거제도 영등포(永登浦) 왜성에서 약을 짓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7년 3월 18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김경태, 「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166, 한국사연구회, 2014.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 - 청병외교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제1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東亞)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조원래,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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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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